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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취중진담(醉中眞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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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15  1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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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근을 했다. 눈을 뜨면 출근을 하고, 눈을 감으면 내일 출근을 생각했다. 하루는 지루하고 한 주의 주말만 짧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재미없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매일 같은 컴퓨터 앞에 앉아 기계적으로 일을 하다보면 불쑥 그녀 생각이 났다. 내 나이였던 그녀를 생각해본다. 그녀가 아닌 다른 이로서의 삶을 꿈꿨을지 모르는 그녀를 떠올린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꼭 그럴 때 퇴근 시간이 유독 느리게 기어온다.

술을 마셨다. 이렇게나 술을 많이 마셔본 경험이 있었나. 정신은 있는데 멍했다. 태어나 처음인 것이 너무 많은 여름, 집을 향해 걸으며 낯선 일을 해본다. 여보세요.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더니 없던 용기까지 만들어주는 건가. 솔직히 말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취한 걸 알아챈 그녀는 가만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듣고 나는 말한다.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았던 날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부르며 오래전에 마음을 뚫고 자란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본다. 진심을 삼키고 거짓을 뱉을 때마다 자라나, 이제는 내 몸집보다 커진 나무가 새삼 무겁다. 느려지는 걸음과 졸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엄마. 그녀에게 고백한다. 엄마. 나, 사실은 엄마가 너무너무 미웠어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되짚는다. 그녀와 나는 자주 싸웠다. 나는 그녀에게 늘 불만이었고, 그녀도 내게 곧잘 화를 냈다. 우리는 서로 물러나는 법이 없었고, 같은 상처를 수년 간 주고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입버릇처럼 그녀를 비난했다.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지 몰라도, 내게 좋은 엄마는 아니야. 나는 그녀가 미웠고, 그녀를 원망하며 진심으로 비난했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에게 한번 건넨 적이 없는 채, 수년이 지났다.

술을 마시고 나서야, 힘든 것들을 잔뜩 마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본다. 엄마가 되기엔 너무 어리고, 여렸던 그녀를 부른다. 엄마. 그녀가, 엄마가 뒤돌아 나를 본다. 스물넷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딸로 살아가는 것이 처음인 내가 있다. 스물 네 해를 키웠지만 여전히 나라는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이 처음인 그녀가 있다. 처음으로 서로에게 서툴 수밖에 없는 우리를 본다. 서로에게 준 미움도 상처도 그저 실수였을 뿐이라고, 그때는 너무도 아팠지만 지나고 보니 아주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단 걸 깨닫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나빴던 것들이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방울방울 떨어진다. 내일을 기약하지 않고, 더는 뒤돌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위해 이 순간에 고백한다. 위대한 화정씨, 당신은 나의 자랑이에요. 내가 엄마의 딸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녀에게 말할 것이 있다. 엄마, 당신이 밉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내가 가장 미웠어요. 사실은 엄마가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좋은 사람을 연기할 뿐, 정작 당신에게 좋은 딸이었던 적이 없었어요. 엄마, 나는 엄마의 곁에서 자주 종알대는 참새가 되고 싶어요. 부디 내가 당신의 삶에 사랑스러운 지저귐을 남기고 싶어요. 스물넷의 여름, 앙상했던 나무 끝에 아주 여린 새싹 하나가 움튼다. 

   
 

/김현희 사회복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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