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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도대체 언제까지 배우렵니까?“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픈 줄 몰랐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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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6  08: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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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어 놓아야 값어치가 있음’을 이른다고 국립국어원은 말합니다.

이 속담은 ‘서 말의 구슬’과 ‘꿰어야 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서 말의 구슬’은 배움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에게 배움이란 타인이 만든 보편타당함을 이성과 논리로써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배움에는 내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저 모방하고 암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고 불편합니다. 배움이 이렇다면 이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데 ‘꿰어야 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분명 ‘구슬 서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이를 ‘익힘’이라 봅니다. 익힘은 남에 의한 배움을 스스로가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보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같습니다. 한마디로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몰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행착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안되나 보다하고 포기하고 말지요.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담같지만 몰입을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치있는 일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각이 필요하며 그래서 책을 봐야 합니다. 몰입과 책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배움과 익힘은 구분하기 어렵지만 참 많이도 다른 것 같습니다. 볼까요. 배움이 채움이라면 익힘은 비움같고, 배움이 듣는 것이라면 익힘은 말하는 것과 같고, 배움이 읽는 것이라면 익힘은 쓰는 것 같습니다. 배움이 개별 요소의 발견이라면 익힘은 그 요소의 연결인 것도 같고요. 또 이성으로써 배운다면 익힘에는 감성이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암기는 창의력을 형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암기의 배움이 밑바탕이 되어야 익힘이 더 크고 수월하게 일어나 보입니다. 누군가 인간은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익히기 위해서는 공감의 감성이 충만할수록 용이합니다.

우리가 언제 익힌다는 동사를 사용하지요? 낯선 듯하지만 생각보다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김치를 익히고, 고기를 익히고, 운전을 익힙니다. 모두 공통의 특징이 있습니다. 형질 변화입니다. 그 전까지 그게(내가) 아니었는데 비로소 그게(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배움과 익힘의 차이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김치를 익히기 위해서는 배추, 소금, 고춧가루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배움 같습니다. 어느 하나만 많다고 김치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루 배워야 하지요. 또 다 있다고 해도 김치가 되지 않습니다. 버무려야 하고 또 숙성시켜야 비로소 김치가 됩니다. 배움 그 자체에 버무림의 예술과 숙성의 시간이 가미되어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익힘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배움의 전형을 하나 보지요. 6 곱하기 8은 너나없이 48을 외칩니다. 그런데 그 48안에는 내가 없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누군가가 만든 것을 그저 모방하고 외운 결과입니다. 물론 이해를 곁들이긴 했지만요.

한번 물어볼까요?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 익히려고 배웁니다. 배움의 완성은 익힘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익히려 할까요? 익히면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배우고 익히면 기쁘다 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기쁠까요?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기쁩니다. 점점 자기를 찾아가기 때문에 기쁩니다. 저는 이것이 기쁨의 최고봉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어제까지 못하던 것을 오늘 하게 되면 기쁜 것 같습니다. 그 기쁨이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런지요. 배움은 ‘우리’라는 대중을 만들지만 ‘나’라는 개인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익혀야 비로소 ‘내’가 만들어 집니다. 배움은 숙제와 같아서 남이 대신 해 줄수도 있지만, 익힘은 밥 먹는 것과 같아서 남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내 배는 부르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배움은 남이 도와줄 수 있지만, 익힘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배운다고 하면 선생은 가르치면 됩니다. 그런데 학생이 익히려고 하면 선생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또 빠르게 배웠느냐는 남과 비교할 수 있지만, 잘 익혔는가는 어떻게 남과 비교할 수 있을런지요. 익힘은 철저히 개별성위에 올려져 있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현 교육의 맹점과 혼란이 들어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배움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익힘에 힘쓰고 있습니까? 이는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질문하는지요? 안한다면 배울 뿐이고, 한다면 익히는 중입니다. 질문은 내 것일 때만 일어납니다. 나는 나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남의 질문에 대신 답을 찾아 주는 자가 아닌, 내 질문에 답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이지만 또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그 ‘또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익혀야 합니다. 이제 구슬 서 말을 닷 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그만하기를 바랍니다. 두 말이라도 잘 꿸 수 있음이 더 가치 있음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 두 말만이
'나'입니다.

이제 선생의 역할은 ‘티칭’에서 ‘코칭’으로 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산파의 역할이 필요해 보입니다. 산파는 아기를 낳아 주는 사람이 아닌, 낳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답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배움은 답이 밖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의 질문에 답 찾느라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익힘을 얻으십시오. 습득입니다. 익힘을 실제로 해 보십시오. 실습입니다. 익힘을 계속하십시오. 연습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익힘을 되풀이 하십시오. 습관입니다. 그러면 운명이 바뀝니다. 채운 배움을 익힘으로써 비워낼 때, 비로소 ‘내’가 되어,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이 견 직 경영학과 경영생태학자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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