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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의 인문학]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초록색 회화의 걸작으로 당시 세간의 화제세잔의 연작 ‘수욕(樹浴)’은 초록색 바탕에 큐비즘의 시초 피카소는 자신의 초기작을 ‘세잔풍의 큐비즘’이라 명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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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3.20  12: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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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초록색 의상으로 제작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미장아빔(Mise en abyme)’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미장아빔’이란 한 작품 안에 또 하나의 작품을 집어넣는 예술적 기법을 말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중앙에 볼록 거울 하나를 위치시킴으로써 아르놀피니 부부의 뒷모습과 함께 화가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얀 반 에이크의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후대의 많은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됐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난 시간에는 인상파 화가인 세잔의 초록색 사랑에 대해 알아봤다. 이번엔 그 후속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초록색은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어 만든 중간색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잔과 같이 인상파 화가였던 고흐는 노란색을, 고갱은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세잔은 동료였다가 나중에 서로 결별하게 되는 고흐와 고갱 사이를 평화의 색으로 중재하려 노력한 화가인 셈이다.

돌이켜 보면, 평화로운 초록색과 달리 세잔의 생은 매우 불우했다. 모자 상점을 운영했던 아버지와 상점 여종업원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법률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화가의 길을 나섰다. 더불어 어려서부터 외골수에 내성적이기까지 했던 그의 성격은 파리에서도 동료 미술인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그의 그림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던 40년지기 친구 에밀 졸라와도 결별하게 만든다. 그런 그는 56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때부터 비로소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세상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워낙 깊었기에 그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그의 고향이었던 엑상프로방스로 세잔은 이곳에서 생트 빅투아르와 수욕(樹浴)에 관한 연작을 발표하며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게 된다. 마치 어느 TV 채널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속세에 상처받은 이들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리하여 생트 빅투아르 산 시리즈와 함께 캔버스를 온통 초록으로 뒤덮은 연작 ‘수욕’에서 그는 입체파의 효시인 큐비즘의 씨앗을 보여준다. 큐비즘이란 평면이 캔버스에 3차원적 효과를 선보인 것. 그런 그의 실험 정신에 영향받아 훗날 피카소는 입체파로 불리는 큐비즘을 완성시키며 자신의 초기 그림을 ‘세잔풍의 큐비즘’이라 부른다.

한편, 현대 회화에서 눈을 돌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연,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눈에 띈다. MBC의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달력시리즈를 통해 정준하가 모델 한혜진과 함께 작품을 재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림에서는 아르놀피니 부인이 입은 진한 초록색 옷이 15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회자됐으며 지금까지 그 유려한 색조를 뽐내고 있다.

덧붙이자면,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장난기 가득하지만 재능이 풍부했던 화가로 북부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라고도 불렸으며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종교적인 그림과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런 얀 반 에이크는 루벤트, 렘브란트로 이어지는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기도 했는데, 사실 그가 서양 미술사에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된 가장 이유는 바로 유화를 발명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서양의 화가들은 광물이나 식물 등에서 색을 추출한 후, 색이 변색되지 않도록 달걀 흰자를 섞어서 사용했다. 문제는 달걀 흰자를 안료와 섞은 물감이 금방 마른다는 것. 따라서 몇 시간만 지나도 배합한 안료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까닭에 자신이 만든 색깔을 시간적 제약 없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안정적인 물감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고심하던 얀 반 에이크는 역시 화가였던 형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함께 색채 가루에 기름을 섞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방식이 대단히 우수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그림에서 성공적으로 시연해 보였다. 안타까운 사실은 유화를 이용해 그가 1434년도에 선보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가 완성과 동시에 미술 애호가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샀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림 자체에 등장하는 복식과 함께 만삭의 임산부가 등장하는 구도가 무척 퇴폐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찬사의 이유는 쉽게 변색되기에 다루기가 무척 까다로운 녹색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의 녹색과 달리 자연에서 추출해낸 녹색은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시커멓게 변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록색 염료의 이상 반응으로 풀밭의 군데군데가 시든 것처럼 보인다. 비록 얀 반 바이크로부터 4세기가 지난 뒤에 제작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쇠라의 작품에서 발생한 이 같은 비극은 초록색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드는 궁금증 하나, 과거의 서양 화가들은 왜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 초록색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혼색이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색깔이 전혀 다른 안료를 섞어 쓰는 것에 대해 오랜 세월에 걸쳐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편견은 연금술사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부정적이었기에 색깔이 다른 안료를 섞는 행위는 마치 연금술사의 사기적인 행위처럼 여겨졌으며 인위적인 색감 역시, 깊이가 없고 천박한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의류 산업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길드의 영향력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많은 나라에서 파란색과 검정색 염색공은 빨간색과 노란색 염료로 작업할 수 없었으며 몇몇 나라에서는 파란색과 노란색 염료를 섞어 녹색을 염색할 경우,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은 물론, 해당 지역에서 추방까지 당해야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길드의 무역 보호주의가 전문직 이기주의로 기능하며 다양한 색의 발전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19세기 말, ‘셀레그린’이라는 악마의 초록색이 만들어지면서 서구에 야기된 비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심훈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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