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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에피쿠로스의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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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5.15  0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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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학교 교직원 식당 뒤편에 있는 ‘사색의 정원’을 오갈 때마다 나는 ‘쾌락의 정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쾌락의 정원은 중국 청나라 시대 작가 이어(李漁)의 저서 <한정우기(閑情偶寄)>의 우리말 번역서 제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회화 제목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유래한 듯하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근교에 정원을 조성하고 거기서 여자와 노예들까지 받아들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논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과 비슷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로 불리면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곧 쾌락의 정원으로 여겨졌다.

단독주택으로 이사온 후 잔디밭 정원과 조그만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지 올해로 5년이 되었다.


텃밭을 정원처럼 꾸민 영국식 텃밭정원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 집 텃밭을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빗대어 에피쿠로스의 텃밭이라고 부르고 싶다. 여러가지 즐거움을 선사하는 쾌락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텃밭에서 만끽하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먼저 수확의 즐거움이다. 봄에 상추나 깻잎 토마토 가지 고구마 옥수수 초석잠 등 갖가지 작물의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서 가꾸다 보면 일년 내내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흔히 한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관심을 기울이고 가꾼 만큼 정직하게 돌려주는 것이 텃밭이다.


물론 텃밭에서 느끼는 수확의 즐거움이 마트에서 허탈함으로 바뀔 때도 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키운 작물을 마트에서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텃밭에서 작물을 키우고 가꾸느라고 땀 흘리고 노동할 때, 그 자체로 느끼는 몸의 즐거움이 크다.


그것은 운동의 즐거움과는 또 다른 노동의 즐거움이다. 내 몸에 잔류된 잉여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운동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 안의 에너지를 외화시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노동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몸의 즐거움은 마음의 즐거움을 이끌어낸다. 적당한 몸의 움직임은 뇌를 자극하고 생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은 원주에서 대하소설 <토지>을 집필하면서 틈틈이 텃밭에 고추심고 배추 키우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소설의 구상을 다듬었다고 한다.

적당히 몸을 움직여 두뇌활동을 자극하는 텃밭이야말로 머리를 식히는 휴식의 장소이면서 새로운 생각이 샘솟는 사색의 장소이다.

에피쿠로스의 텃밭은 뿌린대로 거두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게 하고, 땀흘려 일하는 몸의 즐거움과 머리를 식히면서 새로운 생각이 샘솟는 마음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쾌락의 텃밭, 진실의 텃밭, 사색의 텃밭, 치유의 텃밭이다.

 

/윤태일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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