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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빨치산 자료집』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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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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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는 최근 ‘북한사 연구사업’시리즈의 하나로 『빨치산 자료집』(전7권)을 펴냈다. 이 자료집은 그동안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에 묻혀 있던 방대한 문서를 발굴, 정리한 것이다. 자료집에는 신문류가 45종 7백17쪽, 빨치산 일일보고·사업보고 및 인적사항 등 1천1백97쪽, 경찰 일일보고가 1천7백14쪽을 차지하고 있다. 『빨치산자료집』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빨치산의 구체적인 행적을 알아본다.

빨치산 조직 노선, 활동상 등 자세히 기술
전쟁전·후 남북관계 재해석 필요

  십여년 전에 한 일본인이 쓴 소설을 읽은 이야기부터 적어야겠다. 이 소설의 제목은 『魔笛(마적)이 들린다(1979년)』인데, 우리 민족의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힌트를 얻어 지어진 것 같다는 한 일본인의 권고로 읽어보았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부지로 선택한 한 마을의 주민들이 원전의 건설을 한사코 반대하고 나선다. 일본정부는 마을 사람들이 자멸하도록 밀모를 꾸며 두 패로 분열시킨 뒤 서로 싸우게 한다. 둘로 갈라진 마을은 유혈투쟁, 상대편 부녀윤간, 살인방화 등으로 서로 증오심이 증폭될 대로 증폭된 끝에 자멸을 알면서도 궁지에 몰린 쪽이 의도적으로 댐을 폭파해 마을은 전멸하고 일본정부만이 회심의 웃음을 짓는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이 소설을 읽은 뒤 6.25전쟁이 떠오른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6.25전쟁이 외세의 밀모로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렸으며(For Whom the Bell Tolled?) 왜 울려야 됐는가 하는 하나의 반성이 이번 『빨치산 자료집』(이하 자료집)의 출간과 조금은 관계가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부탁받고 집필에 이르기까지 ‘강릉무장공비침투’ 사건이 일어나고 ‘백배 천배보복’ 발언이 터져나오고 ‘블라디보스토크 피살 사건’이 일어나 필자 자신이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다. 너 죽고 나 죽자식의 협박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대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이 민족의 수난은 어디까지 가야만 하는가?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이번에 출간한 『빨치산 자료집』은 전쟁 초기의 일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진지한 토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고 또 대북관계에 있어서 사려 깊은 지혜를 보너스로 가져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이 자료집은 당장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반면교시(反面敎師)로 어떻게 이 자료들을 소화해 내고 다뤄야 될 것인가의 생생한 실험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선 활자화 돼 있는 것, 또는 쓰여진 것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에는 후퇴하는 우리측 군경이 좌익 죄수들을 대거 학살한 보도가 많으나 우리쪽과 미군의 보고에는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기록이 많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기술이 객관적인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도 많다. 이러한 대량학살의 사실은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믿고 넘어 가겠다.

  인천상륙작전 후 지리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령사이에는 2만명 이상의 유격부대가 도사리고 있었고, 1951년 겨울 본격적인 토벌작전 등에서 약 1만명의 빨치산을 사살한 것으로 통계자료에 나와 있다. 상당히 많은 빨치산들이 가혹한 조건하에서 선전활동을 하다 전사했고 토벌대측이나 민간측에서도 피해가 막심했다. 2백만에 이르는 군사력, 경찰력이 쌍방에 포진하고 있었던 한반도는 유격전을 전개하는데 결코 넓은 땅이 아니었다. 북한에서의 유엔군측의 빨치산 활동은 주로 연해일대의 섬에서 출격하는데 그쳤으며, 남쪽 유격활동도 전선의 교착상태에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투쟁이었다. 장백산맥을 무대로 한 김일성 유격대의 활동은 6·25전쟁하의 빨치산 전쟁과는 그 질에서 판이한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고 그 신화를 모범으로 추구한 산악 투쟁은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적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쪽에서 조직을 온건히 지키려면 지방조직이 입산하지 않아야 했다. 즉 이승엽, 배철의 빨치산 지도 노선은 전선이 교착되는 이상 무의미 했던 것이다. 미군 정보부대는 1947년 2월19일에서 21일까지 남로당의 주요간부인 이현상을 심문했다. 그 심문의 대부분이 동문서답으로 일관된 것이었지만 그 인적사항을 간략히 소개한다.

  그는 1947년에 43세였고 전북 금산에서 출생, 서울 중앙중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1년 수학하다 반일활동으로 1928년 서대문 형무소에 4년여 수감됐고 1년후인 1934년에서 1939년까지 노동운동에 참가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수감됐다. 1941년에서부터 44년까지는 공산주의 서적출판으로 형무소 생활을 했다. 석방후 1년간 ‘휴양’하다가 해방을 맞은 항일 투사였다. 그에게는 1947년 현재 20세되는 아들과 15세와 10세되는 딸들이 있는데 소재를 모른다고 진술했으나 실은 월북시켜 김일성에 맞긴 것이다.

  그 후, 그의 족적을 추적하면 1948년 10월 여수병란사건을 북로당의 지시로 막후 조정했고 입산해 유격활동을 벌이다 1950년 4월에 와서는 50여명의 골수대원들만 남아 이러한 소수 인원으로는 남한내의 투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북상중 덕유산에서 6.25를 맞이 하게 됐다. 1950년 11월 19일경 평강부근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한 이현상의 지리산 ‘빨치산 부대’는 북한에서 인원 보충후 8백명 병력을 김재연 부대와 김관칠 부대로 나누었다. 사령관에 이현상, 정치위원에 여운철이 배치됐고 남한 ‘조선유격대 남부군’이라는 이름을 12월부터 사용 하기 시작했다.

  1951년 2월에서 1952년 9월까지의 그의 활약상은 이번 『자료집』의 남부군 기관지 『승리를 위하여』에서 볼 수 있는데 한국현대사 증언록 1, 『끝나지 않은 여정』에서 김영태의 증언에 의하면 “1951년, 52년 국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살아 남는다는 것 자체가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사정”인 것이다. 그러던 중 “52년도 2차공세때 이현상 선생을 모시고 마천골을 넘으며 9일을 굶었을 때였습니다. 이현상 선생이 전쟁 전부터 데리고 다녔다는 부관이 행방불명돼 이현상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것이었어요… 그 부관 이름이 남해출신으로 고성균인가 그랬는데 그때 도망쳐서 지금은 남해쪽에서 산다고 합니다”라고 김영태는 회고하고 있다.

  미군 군사고문단의 고성균 심문 보고서를 보면 그는 귀순의 증거로 이현상이 자기 생명처럼 애지중지 하던 망원경, 45인치 구경권총, 그리고 나침판을 갖고 귀순했는데 그는 이현상의 지도력, 인간성, 용기를 극구 칭찬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즉 그는 9일이나 굶고 지친 관계로 사는 것이 우선 먼저라고 생각해 하산했을 것이지만, 6·25전부터 모시고 있었던 이현상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때 김영태의 증언에 의하면 이현상이 자신과 행동을 같이한 4명에게 “모두 하산하고 양심만은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이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왜 필자가 이 장면을 기술하는가 하면 이런데서 이현상의 인간성이 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살아남아 다시 유격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953년 8월 박헌영, 이승엽, 배철 등이 미제의 간첩주구였다는 북한당국의 주장이 지리산에 도달하고 내부의 사문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는 평 빨치산이 됐고 9월 18일 산청부근의 빗점골에서 사살됐다. 어느 생포된 빨치산은 자결행을 택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실상이나 역사의 한 부분을 이 『자료집』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빨치산들의 특징은 그렇게 어려운 도피와 산행의 연속 중에서도 자신들의 회의록, 결의문, 보고서, 신문 등의 문건들을 소중히 지니고 다녔으며 전사할 때 옆에 끼고 있는 것이 비일비재해 많은 문건들이 혈흔에 물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난 불운한 사마천이 명작 『사기(史記)』를 썼듯이, 어느 면에서는 역사 서술과 역사 보존욕은 패배자의 몫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이 『자료집』에서는 그밖에 앞으로 연구할 분야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빨치산의 북상루트, 이력 자술서, 공훈록 등과 각종 전투 명령서, 전쟁수기 등의 관련 문건은 좋은 연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이따금 선혈로 낭자하게 적시워진 문건과 신문들을 보면서 망연자실 해져옴을 느끼며 반문하곤 한다. 우익이건 좌익이건 간에 힘껏 싸운 사람들의 기록이 여기에 있다. 왜 타협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는 없는가 하고. 모든 희생자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계속 종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 방선주(아시아문화연구소·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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