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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
산맥 기슭 포트 콜린즈(Fort Collins, 인구 약 12만)의 중심부에 자리한 콜로라도 주립대학(Colorado State University)은 1870년 콜로라도 농대로 출발하여 수
차례의 이름 변경을 거쳐 1957년 오늘의 이름으로 귀착되었다. 현재 8개 단과대학, 55개 학과, 64개 전공을 갖추고 학생·교수 비율 18:1에
총 2만3천여명(대학원생 4천여명 포함)의 등록 학생을 안고 있는 이 대학은 근자에 역동적인 성장과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로 치닫는 시대의 추세와 대학들간의 심화되는 경쟁 속에서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는 와중에 최근, 정확히는 2000년 가을 학기부터, 이 대학의 학제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졸업 학점을 1백28점에서 1백20점으로
낮추면서 새로운 교양교육 프로그램으로 전대학 핵심 커리큘럼(All-University Core Curriculum)을 시작한 것인바, 이 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콜로라도 주립대가 교육 이념과 발전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으며 또 고심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웬만큼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먼저 졸업 학점의 축소는 여러 설명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학생수의 빠른 증가에 상응하는 교수진과 행정인력의 확충이
따르지 못한 사정이 중요한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얼마전 콜로라도 주지사는 모든 공공기관에서의 신규 채용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전대학 핵심
커리큘럼은 4개 단위로 구성된다. 먼저 1학년 세미나(2·3학점)가 새로 개설되어 학교 환경과 생활에 대한 적응을 도우면서 학문하는 엄정한
태도와 방법을 접하게 한다.
같은 맥락에서 1학년 학생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의무적으로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
대학에서도 대학생활의 설계란 이름으로 비슷한 시도를 한 바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시사적인 주제들을 갖고 자유토론을 벌이도록 했지만 강좌의
초점이 분명치 않아 학생과 교수 모두가 불만스러워 했던 것으로 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학문 분야마다 1학년 세미나용 강좌를 제공하여 학생이
흥미를 느끼는 강좌를 선택할 수 있다. 야생동물 탐구, 음악의 역사와 문학의 이해, 미생물학 1학년 세미나 등 모두 39개의 강좌가 설강되어
있다.
둘째, 학문의 기초 능력(Core Competences) 배양을 위해 1) 작문, 2) 발표, 고급 작문, 외국어 중
선택, 3) 수학, 4) 논리적, 비판적 사고를 각각 수강해야 한다(12학점). 우리에겐 수학과 논리적, 비판적 사고의 강조가 이채롭다
하겠는데, 현상과 경험에 대한 정확한 기술, 추상화와 일반화의 사유 및 치밀한 분석과 논증이 학문의 종요로운 기반임을 나타낸다.
셋째, 각 학문 분야의 특성을 이해하고 기초적 지식을 쌓으며 그를 바탕으로 학문 분야들 사이에 지식의 연관과 통합을
탐구할 수 있도록 토대와 시야(Foundations and Perspectives)라는 이름 하에 7개 분야(생물/물리학, 예술/인문학,
사회/행동학, 역사학, 지구적, 문화적 인식, 미국의 공적 가치와 제도, 건강과 복지)를 두루 섭렵하게 된다(24학점). 눈에 띄는 점은 다른
분야들은 한 강좌만 거치면 되는 반면에 생물/물리학(7학점)은 두 강좌 이상(실험이 수반된 강좌 하나를 포함해)듣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술공학의 사회에서 살면서 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고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 삶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 평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또 미국이란 나라의 특징에 걸맞게 자국의 제도와 문화를 타국의 문화적 특성과 비교, 대조의 견지에서 파악토록 한
것은 실용과 자유주의적 교양을 병행시키려는 성향의 징표로 보인다.
2단위, 3단위는 학제 개편 이전과 별 차이가 없는 반면 넷째 단위는 새로 도입된 것이다. 각 전공에서는 2단위에서
배양된 기초 능력과 3단위에서 구축된 지식의 토대와 지적 시야를 통합적으로 발전시키는 강좌들을 지정, 운영하고 나아가 4학년 레벨에서 이상의
모든 학습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강좌를 지정, 운영하게 되어 있다. 영문과를 예로 들면, 토대와 시야의 심화 강좌로 문학비평의 원리가, 종합
정리의 강좌로는 Chaucer, Milton 등의 개별 작가를 연구하는 강좌가 지정되어 있다. 4단위에서 교양과 전공을 유기적으로 연관지으려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다.
영문과는 예술/인문학 분야 교양 강좌에 셰익스피어 강독을 비롯하여 7개 과목을 제공하면서, 타대학, 타과에서 제공하는
많은 교양강좌 가운데서 영문학 전공자에게 필요한 과목들을 세세하게 규정한다. 예를 들면 영문학 전공자는 1학년때 학과에서 지정한 역사학 강좌
가운데 2과목을 수강해야 하고, 또 예술/인문학 분야에서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한 강좌와는 별개로 지정된 철학 강좌 중 하나를 2학년 때
듣도록 되어 있다. 아마도 교양과 전공의 이처럼 밀접한 관계는 학제적 연구의 기반이 넓게 형성되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콜로라도 주립대의 요람을 일별하면서 느끼게 되는 큰 특징이 바로 이같은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이 참으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간판으로 내세우는 환경 연구 프로그램은 전체 55개 학과 가운데 31개 학과에 걸쳐 강좌가 분포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학생 개개인은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지적 흥미나 원하는 직업에 맞는 수강계획을 설계할 수 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것
같다.
이상의 개략적인 소개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콜로라도 주립대의 교양교육은 학문의 기초를 다지고 다양한 학문
분야를 폭넓게 경험토록 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주제나 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질 것으로 기대되는 바, 이는 언필칭 거론되는 경쟁력과도 배치되지 않을뿐더러 나아가 대학이 지향해야할 바르고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담보한다고 믿는 것 같다.
8개 단과대학 중 하나가 College of Liberal Arts인 것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적이다. 우리의
인문대, 사회대, 예술대를 한데 아우른 이 단과대는 말 그대로 풀자면 교양대학이다. 그리고 그 속에 liberal arts 전공이 개설되어
있고, 그 전공자는 예술/인문학, 사회학, 미국학, 국제학 등 어느 한 쪽으로 집중하여 전공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liberal arts
전공자는 교양 학문을 폭넓게 공부해서 의사소통에 능숙하고 논리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회사들에서 선호한다고 한다. 요람에
그렇게 씌어 있다. 주된 이유는 여러 능력을 갖추어 다양한 과업과 작업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것인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전공자들이 대개
일정기간의 직업 바꾸기를 거친 후 만족스런 직업을 얻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식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말을 그래도 필자는 믿는다. 동시에
교양과 실용, 학문과 직업은 연결 지으려고 애쓸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오늘 이곳 학보에 미생물학과의 어느 교수는 대학 요람에 웬 직업에 관한 말이 그렇게 많으냐면서 대학이 무슨
직업학교냐고 푸념했다. 아닌게 아니라 요람에는 모든 전공마다 그 전공으로 얻을 수 있는 직업들이 빼곡이 나열되어 있다. 아울러 그 교수는
콜로라도 주립대 웹사이트의 새로운 모토인 knowledge to go places(좋은 직업, 또는 성공에 필요한 지식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가 대학 본연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며 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인문대 교수도 아닌데 왜
이리 고리타분한 소리를 한 것일까? knowledge to go places란 모토는 어느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교통 정보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해서 앞서 소개한 교양교육의 취지를 감퇴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혼선은 콜로라도 주립대가 처한 현주소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요즘 이곳의 학보와 지방지를 뒤적이면 경기침체로 인해 대학 졸업자의 직업 시장이 좁아졌다고 아우성들이다. 시장의
아우성에 대학이 귀 기울일 것인가? 외면할 수 없다면 대학과 시장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 걸까? 영락없는 인문대 교수인 필자로서는 뭐라
말할 자신이 없다. 대신 목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콜로라도 주립대 물리학과에서 벌인 작은 행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Little Shop of Physics란 이름이 붙은 그 행사는 교수와 지도학생들이 물리학의 기본 원리를 쉽고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생활 주변의 도구들로 여러 장치와 기구를 만들어 장돌뱅이처럼 인근의 초·중·등 학교를 돌면서 전시, 설명하고 어린이와
학부모가 직접 만져보게 했다. 덧붙여 행사를 주관한 교수가 아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런 저런 간단한 장치를 시연해 보였는데, 그것은 장터에서
아이들을 사로잡는 마술을 부리는 것과 흡사했다. 대학이 시장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대꾸하게 되는 그런 모양이 아니라 대학이 시장을 찾아가서
시장을 움직인 아주 작은 예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김번(어문·영문·조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