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 은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행정 보직을 맡고 계시던 그분은 학교의 장기적 발전 방향과 조직 개편 안에 관련해서 여러 교수님들의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 공부를 했는가, 어느 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는가에 따라 교수님들의 의견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더라는 말씀을 그분은 나에게 해주셨다. 사회조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가르치는 나로서는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그 다양한 의견이 자신이 다닌 학교에서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면, 대학교라는 조직이 그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러면 미국의 대학교들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압축적인 발전을 해왔듯이 미국의 대학교들도 유럽의 대학들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 굴지의 대학교로 성장한 많은 예가 있다. 미국의 대학교들은 그동안 많은 혁신들을 이뤄왔다. 미국을 사상적으로 이끌어온 실용주의(pragmatism)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새로운 현실에 대학교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변화해온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미국 대학교들의 역사와 혁신,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대학교들은 동부의 아이비 리그(ivy league)에 속하는 학교들이다.

  프린스톤, 예일, 하버드, 펜실베니아, 콜럼비아, 브라운 등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등장한 대학교들은 종교적 배경 속에서 신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영국 대학들에 제도적 정신적 뿌리를 두고 만들어졌다. 이들은 학부(college)를 중심으로 상류층 젊은이들의 교양 교육(liberal education)을 주로 담당했다. 초기의 미국 대학에서 세속적인 일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대학교들은 엘리트 교육의 전담기관으로서 상당히 배타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소수민족과 여성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들 대학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의 대학교들이 가져온 혁신적 변화는 19세기에 일어났다. 미국의 독립 이후 진취적인 프론티어 정신의 영향 속에서 많은 대학교들이 미국 각지에 세워지게 됐다. 상당수는 주립으로 또 일부는 사립으로 등장한 이들 대학교들은 초창기의 대학교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대학교의 중심이 종교와 철학 등의 인문학뿐만이 아니라 과학의 여러 분야를 포괄하게 되었고, 대학교의 구조 또한 교양학부(liberal arts college)뿐 아니라 대학원(graduate school)을 추가해 연구의 기능을 중요시했다. 또한 법학, 행정/정책학, 경영학, 의학, 공학 등의 직업에 관련된 전문지식을 교육하는 전문대학원(professional school)이 여러 대학에 만들어져서 교육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학부의 폭넓은 교양교육, 전문대학원에서의 전문 분야의 지식 전수와 훈련, 그리고 대학원에서의 학문적 연구와 토론이 대학의 핵심적 기능으로 등장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보는 미국 대학교의 모습과 체계가 기본적으로 갖춰지게 된 것이다.

  물론 대학교들이 일률적으로 그렇게 변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국에는 학부 중심의 교양교육을 전담하는 전통을 강조하는 대학교들, 예컨대 윌리암스 칼리지·다트머스 칼리지 등의 소규모 엘리트 중심 대학교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상당히 많은 변화를 받아들인 아이비 리그 대학교들 중에서도 예일이나 프린스톤처럼 경영대를 운영하지 않는 학교도 있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대학교들 중에는 MIT 혹은 칼텍, 카네기 - 멜론처럼 폭넓은 교양교육보다는 전문적 연구를 더욱 강조하는 학교들도 있다. 대규모의 캠퍼스와 많은 학생들을 거느리고 대학교육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여러 주립대학들도 있다.

  이처럼 미국 대학교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특징짓는 다양성과 개성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심과 취향,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해서 폭넓게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전공분야의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문대학원과 교양학부가 분리돼 전문직을 위한 준비는 전문대학원에서 전담하다 보니, 이른바 취업이 잘되는 전공과 그렇지 못한 전공간의 이해가 엇갈리는 혼란이 없을 뿐 아니라 학생들도 전공 선택의 고민을 많이 덜 수 있다. 미국의 법학대학원, 경영대학원을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그 기초로써 철학,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부제라는 제도는 전문대학원 체제가 확립되고 학부교육과 전문지식교육이 상호보완적일 수 있는 여건에서만 잘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 즉 대학교육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 학생의 모집과 입시, 그리고 졸업 후의 진로라는 처음과 끝만을 생각하는 학부제는 그런 의미에서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학교에서의 공부와 생활을 살펴보면 또한 특징적인 것이 있다. 이른바 명예(honor)와 자율성(autonomy)에 대한 존중이 철저하다는 것이다. 내가 본 놀라운 광경 중의 하나는 학생들이 시험을 칠 때 교수나 조교가 시험감독을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독은 학생들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부정행위를 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부정행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답안지 비교 등을 통해서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그 학생은 무척 엄한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중한 벌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에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학과의 운영에서도 자율성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교수의 채용과 승진 등에서 연구업적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위 동료들의 평가이다. 연구업적이 단순히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로서 학자들의 내부적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인정받을 만한가가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의 교수 임용과 승진 체계에서 핵심적인 정년보장(tenure) 제도와 연봉계약 제도는 아마도 미국의 시장에 대한 믿음을 잘 반영하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럽의 종신제 교수 제도는 그야말로 원로 교수님 한 분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교수 임용의 기회를 꿈꾸기 힘든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미국의 교수임용 제도는 시장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특성, 또한 철저한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초에는 또한 학문 공동체에서의 자율적 업적 평가에 대한 신뢰가 바탕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년보장 심사나 연봉 인상 등의 결정에서 논문의 숫자와 같은 몇 가지 단편적 정보에만 의존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학술지에 좋은 논문을 게재하는 것만이 살 길(publish or perish)이라는 미국 교수 사회의 일반적 통념은 경쟁 시스템을 과학과 학문 발전의 기본적 메커니즘으로 생각하는 미국 대학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이 벌어지다 보니 교육과 연구 이외에는 다른 시간을 갖기 어려운 것이 미국의 교수들인 듯 싶다. 물론 소위 대가가 되고 명망 있는 지식인이 되면 사회적으로 발언도 하고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들 역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미국 교수 사회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대중적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계몽적이고 비판적인 역할을 방기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해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또한 이처럼 전문화되고 학문적 관심이 충만한 교수 사회가 있기에 미국이 지식기반경제 속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학문적 탁월함(academic excellence)을 지향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 혹은 패러다임의 등장에 즐거움을 느끼는 학자적 특성(scholarship) 때문에 미국의 교수들이 긴 노동시간과 박한 보수에도 불구하고 교수라는 직업에 만족하고 남아 있는 것이라면, 나는 우리들이 흔히 하듯이 계약제와 연봉제의 문제를 시장적 시스템을 도입할 것인가의 여부 혹은 교수의 신분 보장을 해줄 것인가의 여부로 좁게 한정시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학문에서 시장 논리가 제대로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기초, 즉 학문공동체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있다. 만약 연봉제와 계약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는 미국에서는 교수들이 자신들을 시장의 상품이나 회사의 종업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아직 이러한 제도의 도입 초기에 불과한 우리 사회에서 교수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음호(273호)에는 프랑스의 대학편이 이어집니다.

/ 한준(사과·사회·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