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평등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주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평등은 예전부터 이미 논쟁을 불러왔던 주제였고 그 주장 또한 다양하다. 자유와 효율의 지상주의가 전개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등을 호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인가? 현실 사회주의 몰락이후 과연 평등은 소멸돼야 할 가치인가?

  학술부에서는 ‘평등’의 고전적 이론을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평등의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을 마련, 한국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보다 멋진 미래의 가치가 무엇일 수 있는가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다음은 그 순서이다.

① 총론
② 고전적 평등사상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③ 로크와 루소
④ 현대의 사상 - 롤즈와 노직
⑤ 새로운 대안 모색 - 드원킨과 월저

  현금의 우리 나라의 학술적, 시사적 담론에서 개인적 자유의 신장에 관한 논의는 풍부하고 지속적인 반면에, 얼마나 평등이 확대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많은 관심과 논의가 기울여지지 않고 있다. 국민 일인당 평균 소득의 증대와 같은 수치상의 복지 증대가 강조되지만 복지의 최고 계층과 최소 계층 사이의 차이에 관해서는 자주 지적되거나 논의되지 않는다.

  그러나 평등은 여전히 중요한 이념이다. 이것은 단지 낡은 사회주의의 유물이 아니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제도 하에서도 평등의 이념은 최대로 실현 가능한 그 내용이 밝혀지고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이 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신념이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학 및 사회철학자인 존 롤즈(John Rawls)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사회계약론적인 전통에 선 롤즈에게 정의로운 사회체제의 구조에 대한 논의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인 개인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원리들의 탐구로부터 비롯할 수밖에 없다.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 롤즈가 제시하는 것은 기본적 정의의 원리들을 선택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가상의 상황 -원초적 상황(the original position)- 이다. 이 상황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도 아니며, 무한히 이타적인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기적인 삶의 계획을 수립하고 합리적으로 변경할 수 있으며 그 계획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것을 궁구할 수 있는 타산적인 개인들이면서, 남들의 이익에는 무관심하지만 서로가 동의한 원리들을 이해하고 준수할 만한 정의감을 소유한 개인들이다.

  정의의 원리들이 선택되는 이 상황에서 또한 개인들은 자신들이 (현실에서) 가진 사회적 지위와 계급, 자연적 재능과 특정 삶의 목표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gnorance)’이 필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만이 특정 개인들이 가진 (자신들이 스스로 벌지 않은) 혜택과 (주관적으로 자신들만이 가진) 기호에 의해 부당하게 기울어진 원리들이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들이 선택할 정의의 두 원리들로서 롤즈가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 1원리: 각 개인은 다른 모든 개인들에게 유사한 자유의 체계가 소유되는 것과 양립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동등한 기본적 자유들의 전체적 체계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제 2원리: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은, 그것이 최소 수혜자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이 되고 직위와 직책들에 대한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한에서 허용될 수 있다.

  이 두 원리들 중에서 기본적 자유들의 최대한의 평등을 규정하는 첫째 원리는 기타 사회적, 경제적 부와 힘의 불평등의 요건을 규정하는 둘째 원리 -차등의 원리(the difference principle)- 보다 순차적으로 우선한다. 즉 기본적 자유들은 단지 경제적 부 혹은 효율성을 위해 희생되거나 축소될 수 없다. 이렇게 개인적 자유의 우선성이 강조되는 한편, (재능과 출신에 따른) 우연적 혜택에 의한 이득의 산출이 모든 이들에게 보탬이 될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점에서 롤즈는 자신의 입장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인 요소들의 조화로운 결합을 성취한다고 본다.

  롤즈가 말하는 바 일차적 선(primary goods : 그 어떤 합리적 인생계획에서도 필요한 자원들)의 평등이 사회적 정의의 수준점(benchmark)이라는 주장, 현실적으로는 지위와 직위가 개방된 한에서 최소수혜자에게 최고 이득이 되는 불평등만이 허용된다는 주장에 관해서, 과연 이러한 입장이 평등주의에 대한 최선의 유형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지난 30여년간 영미 윤리학과 사회철학계의 한 과제였다. 실제로 최근에는 롤즈에 대한 논의의 바탕하에서 평등과 관련된 세 가지 논점들이 집중적으로 주목받고 있다(이번 특별 기획의 첫 번째 글인 ‘총론’ 참조) : “무엇이 평등하게 되어야 하는갚(the currency of egalitarian justice), “왜, 어떤 방식으로, 최소수혜자가 우선시되어야 하는갚(the priority of the worst-off), 평등 분배에서 개인적 책임과 운의 역할(luck and responsibility in egalitarianism).

  첫째로 국가 혹은 제도의 개입을 통해 평등하게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는 단지 기회 평등 -동일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자는 입장- 과 결과적인 복지 평등 -출발점 뿐 아니라 복지의 종착점을 균일하게 하자는 입장- 사이의 어떤 중간 지대에 설 것인지의 문제이다.

  둘째로는 롤즈에서와 같이 항상 현 상태에서 최소수혜자부터 차례로 이득을 극대화하는 입장(leximin), 단지 일정한 지점에까지만 최소수혜자의 복지를 올려주면 사회정의는 구현된다는 입장, 그리고 복지 극대화의 판단에서 낮은 계층부터 그 계층에 귀속되는 복지(기회)에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최소수혜자에게 우선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들이 대립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이 자신의 행동결과에 대한 승률을 알고 선택한 운(option luck)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나 의도와 무관한 운(brute luck) -예를 들어 선천적 장애-에 의한 복지 기회의 상실은 일단 제도적 배분을 통해 보상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체로 인정된다. 이러한 논의들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에 대한 최소주의(노직의 입장)로부터 강력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사실 ‘평등’의 이념이 우리의 상황에서 윤리적, 정치적 담론에서 기본적 범주로 정착되고 논의된 역사가 일천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일차적 책무는 평등의 근거, 요지, 대상, 범위에 대한 치밀한 탐구일 것이다. ‘자유’, ‘사생활’, ‘권리’ 등의 다른 이념들에 대한 담론이 약진하는 가운데 상실되고 있는 ‘평등’에 대한 이해와 탐구는, 그 이념에 대한 직관적 매력을 느끼고 유지하면서, 위에서 언급된 요소들에 있어서 합당한 국가와 제도의 역할을 탐색하는 노력을 통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 주동률(인문·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