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평등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주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평등은 예전부터 이미 논쟁을 불러왔던 주제였고 그 주장 또한 다양하다. 자유와 효율의 지상주의가 전개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등을 호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인가? 현실 사회주의 몰락이후 과연 평등은 소멸돼야 할 가치인가?

  학술부에서는 ‘평등’의 고전적 이론을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평등의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이의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을 마련, 한국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보다 멋진 미래의 가치가 무엇일 수 있는가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다음은 그 순서이다.

① 총론
② 고전적 평등사상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③ 로크와 루소
④ 현대의 사상 - 롤즈와 노직
⑤ 새로운 대안 모색 - 드워킨과 월저

  평등이 의미있는 정치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은 이래, 많은 평등론이 제안돼 왔지만 어느 것도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결과의 평등은 기회의 공정성을 해치며, 자유주의자의 평등은 사회주의자의 분배적 정의를 실현불가능하게 하고, 사회주의자의 평등은 자유주의자의 권리개념을 부당한 것으로 만든다. 더욱이 이 모든 평등이 그 옹호자들 각각에게는 수용할만한 개념으로 비춰진다면 ‘평등’이라는 용어는 오용되고 있거나, 적어도 단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월저(M. Walzer)의 평등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평등이 일의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제비뽑기나 순번제를 통해서 배분하는 것이 공정할 수 있지만, 각자의 선호도가 다른 일거리는 협의를 통해 고정적인 담당자를 두는 방식이 더 평등한 것일 수 있다.

  평등은 분배의 대상 - 권리나 재화, 일자리 등 - 에 대한 그 사회 성원들의 태도에 일차적으로 의존하므로, 이러한 고려없이 무조건 순번제를 적용하거나 항상 고정적인 담당자를 정하는 것은 평등 개념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월저는 평등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다른 통념들과 구분해 ‘복합평등(complex equality)’이라고 명명한다. 반면에 드워킨(R. Dworkin)은 이러한 난맥상을 평등 실현의 수단을 통해 해명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시장과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분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시장과 대의민주주의는 그 형식성으로 말미암아 분배 대상과 무관하게 각자의 입장을 모두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이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대의민주주의가 종종 다수의 소수억압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작용은 누진세 제도를 이용하거나 소수자들에게 특정한 권리들을 보장해 줌으로써 완화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시장과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관을 파악하기 위해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또다른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낳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평등관은 월저가 집단의 자기결정성을 강조함에 반하여 드워킨이 그러한 집단을 전체적으로 통섭할 의무를 갖고 있는 정부의 중립적 역할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구분된다. 전자의 입장을 받아들일 경우, 평등은 사안과 관련된 공동체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평등은 개별 공동체의 이해를 넘어선 초공동체적 원리가 된다. 전자가 모든 일에 동일한 원칙이 적용될 필요는 없다라는 견해라면, 후자는 적어도 공적인 활동에 관한 한, 시장과 대의민주주의라는 공평한 원칙이 요구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삶의 방식은 그 스스로에 의해서 결정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양자의 견해는 동일한 평등관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월저의 평등관이 서로 유사한 삶의 방식을 가진 공동체 내에서의 자기결정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드워킨의 그것은 다소 이질적인 공동체(또는 개인) 사이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국가 차원에서는 드워킨의 평등관을 적용하고 소단위 공동체에서는 월저의 견해를 수용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배열이야말로 드워킨과 월저가 진정으로 기대하는 평등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러한 두 입장의 장점과 단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평등에 대한 견해는 항상 무엇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것이 결정되지 않으면 평등에 대한 논의는 진척될 수 없다. 그리고 양자의 논의는 평등의 대상이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과 관련된 논쟁을 이론적으로 한층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관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해 버린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양자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 차원의 이견은 더이상 개입불가능한 사적 영역으로 남겨지며, 소공동체 차원의 견해차는 다수의 견해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 국가나 지역사회, 또는 소공동체 내에서마저 소수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어떤 식으로든 논의과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평등론은 그것이 배제하는 소수가 존재하는 만큼, 꼭 그만큼 불평등론의 이면인 셈이다.

/ 정원규(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