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의 스님들은 도를 깨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수행에 정진한다. 때로는 잠도 자지 않고 눕지도 않고 몇 개월씩 한 곳에서 용맹정진한다.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노력이다. 그러나 그렇게 깨달음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깨달음을 유지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수행을 또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얻은 깨달음도 지켜나가지 않으면 금새 달아나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대오각성하여 확실히 도를 깨친 스님이라도 몇 개월씩 다시 수행에 들어간다. 이와 비슷한 작업이 상담에서도 필요하다.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대가들 중에는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과정을 불교의 깨달음의 과정에 많이 비유한다. 이 깨달음의 유지라고 하는 것도 그 하나이다. 상담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 또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깨닫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다. 그러나 깨닫고도 그것을 곧잘 잊어버리거나 깨달은 후에 그것을 유지시켜나가는 노력이 부족하여 다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깨달은 내용은 반복해 학습해야만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을 상담에서는 훈습(薰習, working through)이라고 하는데, 이 훈습이라는 우리말도 실은 불교에서 빌려온 단어이다.

  어떤 여학생이 나와 상담을 하면서 자기 문제가 아버지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무섭고 권위적이라서 그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항상 주눅들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남들이 자신의 말에 핀잔이나 비난을 할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자기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기는 하였으나 초반에는 심정적으로 깊이 느끼지 못해서 확실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담이 진행되면서 이 학생은 필자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필자도 남자 어른이라 필자에게도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 보이기 위해 좋은 얘기만 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학생에게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주며 ‘나에게도 아버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좋게 얘기하기만 하고 나에 대한 불만스런 감정을 잘 표현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해 주니 그 다음부터는 나에 대해서도 자기 주장을 하고 표현을 했다. 즉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나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 감정을 계속해서 자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훈습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여학생은 상담초반에 자기 문제의 원인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깨닫는 것은 금방 잊혀진다. 상담과정을 통해서 상담자인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있음을 반복하여 깨닫고 그것을 직접 표현하면서 많이 좋아졌다. 이렇듯 무엇인가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것을 깊이 마음속에서 유지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이나 기름이 공기 중에 증발하듯이 사라져간다. 어렵게 깨달은 내용은 그만큼 귀한 것이다. 보물을 간직하듯 소중하게 간직하여 그 빛을 잃지 않도록 해야한다.

/ 최명식(학생생활상담센터 전임상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