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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계속되는 교육 평등화의 실험 봄에는 두꺼운 대지를 뚫고 나온 새싹들이 대학교 교정 여기저기를 녹색으로 물들여 가는 곳,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벌거숭이 차림의 대학생들이 잔디밭에서 뒹굴며 일광욕을 즐기는 곳, 가을에는 대학로 가로수 길바닥에 잘 익은 사과들이
뚝뚝 떨어져 굴러다니는 곳, 겨울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드높이 솟은 얼음 궁전으로 자신의 자태를 우뚝 드러내는 곳, 바로 이 광경은
모스크바 대학교 사계절의 모습이다.
한러 수교(당시는 한소 수교라 칭했다)가 맺어진 얼마 후 1992년 모스크바 대학에서 필자가 처음 접한 이 광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각박한 한국의 경쟁 사회에서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떠할지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러시아에 도착해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모스크바 대학이 놀라운 첫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는 한가로움을 넘어서서 어찌 보면 나태함이 엿보이는 듯 싶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여유와 풍요를 느끼게 했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에
복종하여 그저 적응 위주로만 살아온 듯한 모습이면서도, 그 속에는 끈끈함 힘과 거친 의지가 숨어 있는 듯 했다.
사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광경에서 비롯된 느낌만은 아니었다. 문화적 충격이라고까지 표현하면 좀 과한 걸까? 사실 과거
사회주의 종주국이었으며 오랜 기간 사회주의 체제를 겪었던 러시아의 대학이 한국의 대학과 많은 점에서 다를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측은 했었다.
아마도 필자의 이야기는 먼저 러시아 대학의 역사로부터 시작해야할 것이다. 파란만장한 러시아의 역사를 모르고 오늘날의 러시아 대학을 이해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오늘날 보이는 근대적 학문 기관이나 대학교육의 뿌리는 제정 러시아의 뾰뜨르(영어식 발음으로는 피터) 대제와
예까쩨리나(에카테리나) 여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연방 과학 아카데미는 뾰뜨르 대제의 학술원에 직접적인 기원을 둔 것이고, 모스크바
대학은 예까쩨리나 여제 시대에 자연과학자인 로마노소프에 의해 러시아 최초의 대학으로 탄생되었다. 18세기 말엽에는 중간계층 일부에게까지 혜택을
줄 수 있는 보통학교들이 군소 도시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초등학교나 중등학교와 같은 보다 세분된 교육기관들이 러시아
전역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층은 주로 귀족층이나 중간층의 자제들이었다. 게다가 교육의 방향은 관제국민주의 이론을
주입시키는 데에 주안점이 두어졌으며, 짜르(차르)의 전제주의 체제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모든 사고와 사상들은 가차없이
차단되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전까지 12개의 대학교가 만들어졌지만, 국민의 과반수는 글도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 상태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대에 들어와 러시아의 교육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볼셰비키 정권은 교육의 민주화와 평등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었으며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 자녀들에 대한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1930년대 한 때는 노동자 출신의
대학생이 전체 대학생 중에서 약 60%를 차지하기도 했다. 흐루시쵸프 시대에는 사회 내 특정 집단의 특권이 재생산되는 것을 교육과정 속에서
배척하고 중등교육이 대학입학을 위한 입시기관이 아닌 대중적 교육기관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교육 개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어쨌든
이전의 제정 러시아 시대와 일반 자본주의 국가의 교육관과 이념적으로 차별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960∼7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 인구의 20%에 불과했던 인텔리겐챠의 자녀들이 전체 대학생의 60%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부 대학 학과의 경우에는 입학 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하게 되었으며, 특정 대학 학과의 경우에는 특권층의 자녀들만이 주로 입학할 수
있는 등 처음의 교육 취지와는 어긋나는 현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소련에서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육이 지배문화의 재생산
도구로 기능하고 한정된 사람들만의 신분 상승의 통로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물론 사회주의 이념들에서 표현되는 화려한 미사여구의 교육관을 충족할 만큼 교육현실들이 따라준 것은 아니었다. 전체 학생 중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약 20% 정도였다. 나머지는 졸업 후 곧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전문적 기술교육기관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있었다. 여기의 교육과정은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었다. 대학 졸업자의 경우, 그들이 전문적
기능인으로 사회에 진출해 받는 평균 임금이 강도 높은 육체 노동을 하는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보다 낮았다.
이러한 소비에트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대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통로나 부를 획득할 수 있는 필수적 요소는 아니었고,
대학 졸업장이란 우리나라처럼 기를 쓰고 얻어야하는 증서도 아니며 어떤 특권 계급의 면허장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대학교육이 전체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적어도 절대적인 중심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시대나 혹은 현재 러시아
사회의 지배 엘리트의 대다수가 적어도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대학 교육이 이들 존재의 충분 조건은 된다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시대의 대학들은 우리나라와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다. 보통 종합대학은 주요 도시의 경우 한 두개 정도이며, 나머지
대학교육과정은 주로 연구소에서 이루어진다. 연구소는 마치 하나의 단과 대학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같은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종합대학에서는 교육과정이 주로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교육 및 연구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구소의 경우에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교육 및 연구
내용을 지향하고 있다.
종합대학 중심의 우리나라 교육 현실과는 달리 러시아의 연구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 러시아 학생들의 경우
종합대학보다도 전문화된 연구소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소비에트 시대에 학생들의 학비는 무료였고, 게다가
대다수가 장학금까지 받았다. 결국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대학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이 가지는 위상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학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시장경제체제에서 다시 일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약화되다 보니 대학들은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많은 국립 대학들이 사비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할 수 있는 학생들을 별도로
입학시키고 있고, 대학 강의실의 많은 부분이 외부인에게 사무실로 임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시장경제에서 요구되는 전문성 함양에 초점을 둔
사립 대학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외국어 학과나 시장경제에 필요한 경영학과나 법학과가 인기학과이다. 교수들은 물가 상승을
쫓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낮은 봉급 때문에 불가피하게 부직을 얻거나 혹은 수익성 있는 학술 프로젝트를 만들어 돈 많은 외국기업이나 외국연구소를
찾아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되었다.
1990년대 초의 러시아 대학과 이제 시장경제가 10여년 진행된 지금의 대학 현실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바야흐로 이제
시장경제는 러시아 대학에까지 파고든 것인가? 이 질문은 아직 물음표 상태로 남겨 놓고 싶다. 자신의 친절과 웃음을 돈으로 매겨지는 서비스
상품으로 포장하여 내다 파는 데에 아직도 어색해하는 러시아 국민이 다수로 남아 있는 한은 뭔가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러시아 유학 초기 러시아어 실력이 부족하여 강의실에서 어떤 여학생의 공책을 빌려 보고자 했을 때, 그 학생은 자신의
글씨가 엉망이라고 말하며 아예 깨끗이 정서한 요약 노트를 다음 강의 시간에 가져다주었다. 어떠한 금전과 사례도 거부한 채 총총 걸음으로 그녀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미소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 비추어졌던 모스크바 대학의 첫 광경들은 이제 허공 속에서 시간이 정지된 듯한
모습으로 서랍 속의 낡은 사진처럼 보관되어 있다. 그 사진들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생생하게 그 때를 회상해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다음호(278호)에는 중국편이 이어집니다.
/ 최우익(지역·러시아·강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