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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0년대 이래 일본이 길고 긴 불황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자, 일본의 경제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는 드물게 되었다. 『왜 일본은 몰락하는갱(1999)라는 일본의 한 경제학자의 저술에서 보이듯이,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스스로를 질타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 사회 전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성역 없는 개혁’이라는 정치인들의 다급한 개혁론을
정당화시켜주고 있으며, 개혁론의 파장은 결국 교육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일본의 정치개혁론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정부의 권력 행사와 재정부담을 축소하는 작은 정부론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자민당은
개혁의 일환으로 국가 공무원 20% 감축 방안을 이미 제시하였다. 국공립 대학(전문대학 포함)의 교수의 수는 약 16만 정도이며, 이는 국가
공무원 전체의 약 20%에 해당한다. 만일 국공립대학 교수의 신분을 공무원 숫자 계산에서 뺄 수 있다면, 자민당의 원대한 계획은 쉽게 성공할
것이다. 지난 세기말 일본의 국립대학 민영화론이 대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국립대학의 민영화는 간단한 일이 아니며, 결국 이러한 논의는 국립대학을 독립행정법인(Agency)으로 바꾸는 쪽으로
정착되었다. 즉 내년 3월 국립대학 「독립행정법인화안」이 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다.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메이지시대 이후로 유지되어온
일본의 국립대학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독립행정법인의 형태는 아직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그동안 국가의 관할
아래 놓여있던 대학의 예산편성과 인사권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행사하고, 한편으로는 일정기간마다 외부 평가를 통해 각 대학의 생존과 도태가 결정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 대학이라는 교육의 영역에 효율성과 시장원리를 성급하게 도입하는 방식이라는 비판 또한 적지 않다. 그리고 한 개의 대학을
그대로 한 개의 법인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도쿄대학을 제외한 도쿄 시내에 있는 5개의 국립대학(도쿄의과치과대학,
히토츠바시 대학, 도쿄공과대학, 도쿄예술대학, 도쿄농과대학)이 통합될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소규모의 국립대학은 통합된 형태의
법인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이미 동일한 지역에 있는 지방의 국립대학들이 상호 통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국립의과대학 중에서는 사립대학의 의대와
통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국립대학의 통폐합 바람은 공립대학도 피해갈 수 없으며, 지난 2월 도쿄 시내의 도립대학,
도립과학기술대학, 도립보건과학대학, 도립단기대학 등 4개 도립대학의 통합 선언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대학개혁의 거친 물결은 국공립대학에 한정된 것은 아니며, 사립대학 또한 수수방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본의 사립대학의
평균 수업료는 1백30만엔 정도이며, 국립대학에 비하면 1.5배에 해당한다. 비싼 수업료만큼 국립대학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사립대학을 더욱 더 긴장시키는 것은 일본 사회의 출생율 저하 현상이다. 출생률의 저하는 결국 수험생의 감소를 초래했고, 지난 92년부터 수험생
수가 감소돼 왔다. 수요의 감소는 공급 과잉으로 나타나, 대학 사회 전체를 통틀어 학생 확보를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작금의 대학개혁론은 이와 같은 정치 사회적 현실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이며, 대학의 위치와 역할을 재정립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적인 교육제도는 메이지 시대에 시작되어 약 1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대학은 스스로의 위치를 명확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부국강병을 담당할 행정관료나 기술관료를 육성하는데 상당한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국립대학에 공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이 많은 것도 국가주도의 대학정책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쿄제국대학은 이러한 목적
아래 설립된 일본 최초의 대학이었다.
이후로 교토, 센다이(도호쿠), 후쿠오카(규슈), 홋가이도, 오사카, 나고야에 제국대학의 분교가 설치되었고, 이들이 각각
독립해 7개의 제국대학이 되었다. 이들 대학은 2차대전 이후 명칭상 ‘제국’이라는 글자를 뺀 채로 유지되었으며, 지금도 일본 국립대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물론 서구사상이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민간의 사립대학도 등장하였다.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 지역에는 게이오, 와세다,
츄오, 호세이, 메이지, 릿쿄 등이 있으며, 오사카를 중심으로하는 관서지방에는 도시샤, 간사이, 간사이가쿠인, 리츠메이칸 등의 사립대학이
있었으나, 당시 제국대학의 위세에 눌려 오늘날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다.
2차대전 이전의 일본의 대학은 대체로 근대화 과정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차대전 패배 후 미국의 「점령군사령부」는 일본의 고등교육 개혁에 착수했으며, 대학의 이념도
종전의 군국주의·전체주의에서 자유주의·개인주의로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점령정책은 제도상에서 볼 때, 일본의 다양한 형태의 고등교육 기관을
4년제의 대학으로 일원화시켰으며, 그 결과 대학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현재 일본의 대학은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을 합쳐 6백개를 웃돌고 있으며, 그 비율은 2 : 8 정도로 사립대학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45%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오늘날 일본의 대학은 종전과 같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보다 넓은 교양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엘리트교육에서 대중교육으로 전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의 수적 증가 및 진학률의 증가가 반드시 일본의 대학을 질적으로 성숙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중교육 정책은 오히려 대학교육의 수준을
저하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의 대학생들을 살펴보면, 학문의 연구와 학습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부에서는 대학생들이 수학의
분수나 이차방정식을 모를 정도로 기초 학력이 낮다는 비난이 새어나오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부대학에서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자, 고교과정의
수업을 보충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또 대학의 교육과정이 학문의 탐구라는 본래의 정신과는 달리 취직 준비를 위한 학원으로 바뀌고 있다는
개탄의 소리도 들리고 있다. 심지어 대학을 졸업한 뒤 할 일을 찾지 못해, 뚜렷한 목적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도
나와있다.
대학의 제도나 내용 면에서 일본의 대학은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독자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연구 또한 국제적인 안목이 부족하다는 극단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가 분출하고 있는 가운데, 「문부과학성」은 ▲열린대학
▲국제화 ▲개성화 ▲정보화 등의 새로운 이념을 대학에 요구하고 있다. 수험생의 절반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 속에서 대중교육의 필요성은 점점
강조되고 있지만, 대학의 커리큘럼이나 제도는 여전히 엘리트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종전 일본의 대학은 대체로 교양학부가 전공과정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대학의 교양수업을 전담했다. 그러나 지난 1991년
「문부과학성」은 도쿄대학의 교양학부를 제외하고, 다른 대학의 교양학부는 전부 폐지하였다. 대학에서 교양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도
없이, 4년 동안의 일관된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교양교육 자체가 파기됐다. 그렇다고 학부과정에서 전공교육과 엘리트교육이 충실하게 시행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문부과학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과 대학원을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즉 학부는 대중교육에 중점을 두고, 엘리트
교육은 대학원과정으로 이행하는 이른바 대학원 중점화 계획이다.
옛날 제국대학 계열의 국립대학은 이미 「대학원중점화」 정책을 수용하여 실시하고 있으며, 사립대학들은 대학원 연구 인력의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뿐이다. ‘대학원중점화’ 정책은 교수와 학생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연구를 요구하는 교육과정을 대학원에 설치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대학원중점화 정책에 포함되지 않은 대학은 연구보다 단순히 교육만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또한 일본의 대학이 전공교육보다
교양교육을 대학의 이념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은 지난 1991년 개혁과정에서 남겨두었던 도쿄대학의 교양학부이다. 도쿄대학의 고마바
캠퍼스는 교양교육을 전담하는 학부이며,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2년 동안 여기에서 수학한다. 2년 동안 교양과정을 이수한 뒤, 혼고 캠퍼스의 전공
과정으로 옮겨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교양학부에서는 자체적으로 3, 4학년 과정을 설립, 대학 과정에서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는 대학 과정의 교육을 전문교육보다도 교양교육에 중점을 둔 제도이며, 일본의 대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점칠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교양학부 후기과정에 설치된 분야를 살펴보면, 지역문화과학, 초역(超域)문화과학, 종합사회과학, 기초과학, 광역과학,
생명인지과학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새로운 스타일의 교육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쿄대학 교양학부의 새로운 선택을 통해서 볼
때, 대학의 교양교육은 격변하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탐구를 위한 모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양일모(인문·철학·조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