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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서천(西天)으로 1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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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03.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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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西天)으로 1 / 최정례

서천 냇갈에 고기 잡으러 갔다
솜 방맹이 석유 묻혀
깊은 밤 검은 내 불 밝히면
붕어들 눈 멀거니 뜨고 가만 있었다
흐르는 냇갈 안고 자고 있었다
밑 빠진 양철통 갖다대도
아직 세상 흐르는 줄 알고 가만 있었다
우리 언니 죽을 때 꼭 그랬다
착한 눈 멀거니 뜨고 입 벌린 채

  개인적인 경험 하나. 저는 몇 년 전 이 시를 읽으면서, 시에서 ‘언니'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습니다. 거리에서나 집에서나 지천으로 깔려 있는 ‘언니'가 문자가 되어, 그것도 소설 속의 대화가 아닌 시의 짧은 행 속에 자리하는 것을 본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꼭지가 터진 듯 수 많은 언니들이 저의 사사로운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지요. 놀이터 그네를 빼앗아주고 종이인형을 오려주던 식모 언니, 중학교 때 짝사랑 하던 얼굴이 하얗고 터프했던 선배 언니,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옷가게의 앳된 점원 여자애…… 정말 말끝마다 언니, 언니, 언니, 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어떻게 이 시가 내 안에 있는 숨은 언니들을 끄집어낸 것일까, 하고 자문합니다. 이 시의 언니는 별다른 미학적 의장을 걸치지 않은, 정말로 시인의 언니인 것 같습니다. 보편적 은유나 상징을 이용하는 대신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헐거운 서술로 구성된 시이지요. 붕어는 죽어가던 언니의 모습을 비유하기 위해 쓰인 소재가 아닙니다. 밤잠 자는 붕어의 모습에서 언니에 대한 기억이 떠 오른 것 뿐이예요. 이 기억은 어쩐지, 붕어 잡이 놀이를 언니와 함께 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죽기 전의 언니와 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은 언니와 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인상일 뿐 언니와 시인의 관계는 비어 있습니다. 둘이서 무얼 했는지,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는지, 아니면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이 있었는지, 시는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텅 빔은 무심함이 아닌, 몹시 짙은 감정에서 오는 것일 겁니다. 그 짙은 감정을 그리움이다, 아픔이다, 등으로 바꾸어 말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겠지요. 그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감정이라면 애초에 이런 텅 빈 듯한 풍경으로 보여질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이제 이 죽은 언니는 스스로의 구체적 삶이 지워진 자리에, 이 시를 읽는 이들의 마음 속에 묻혀 있던 언니들을 불러냅니다. 이따금씩 말이예요. 이런 식으로 혹시, 이 언니는 “착한 눈 멀거니 뜨고" 여기 저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신지연(시인·교양교육부 교양작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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