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 사춘기 3 / 김행숙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 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몃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깍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
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

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 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있는 소녀와,

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 소녀는 똑똑하다.
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무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한 소년이 있습니다.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년과 소녀 사이에 인상 깊은 사건 하나쯤 일어날 법한, 그런 시간입니다.

  그런데 일어난 일이란 기껏, 소년이 소녀에게 손바닥을 펴서 칼을 보여주고 다시 손을 오무린게 전부이네요. 이전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었나 봅니다. 서로의 집에 놀러간 적도 없다잖아요. 그렇다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들썩거리는 내면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도 아닙니다. 소년의 머리 속엔 해수욕장에 누운 소녀에 대한 어떤 상상들이 스쳐지나가기는 하지만, 그게 또 뭐 집요한 욕망으로 연결되거나 그런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칼을 사이에 둔 이애들의 공간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라는 야무지고도 야멸찬 말과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라는 희한한 카리스마 사이에서 우리가 만나는 언어들은 소년의 상상을 기술하고 있지만, 그 행간에서는 언어화되지 못하는 두 아이의 눈빛과 마음이 지그재그로 움직입니다. “희" 하는 소년의 웃음과 손바닥 속으로 사라진 칼은, 아마 제삼자인 우리가 공유할 수는 없는, 그애들만의 보이지 않는 언어가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행간에 숨어 있는 소년과 소녀의 언어를 읽어내기를 원한다면, 저는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지는 무심한 마법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손을 오무려 칼을 움켜잡는 행위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움켜진 손 안에 손가락과 칼이 정말로 없을지 모른다는 판타지를 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 역시 이 기이한 느낌 속에 젖어들지 못한 채 이애들의 주위만을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저는, “어른"이거든요. 가까운 시절에 사춘기를 보낸 그대들 중의 누군가, 칼을 사이에 둔 한 소년과 한 소녀의 마음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 신지연 시인·교양교육부 교양작문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