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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때이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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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05.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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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지

개는 전신으로 몽둥이를 받으며 으릉거렸다
곰은 피를 흘리면서도 곧게 서서 덤볐다
뱀은 몸을 접었다 솟구치며 독니를 꽂았다
멧돼지는 올무 걸린 나무를 뿌리째 뽑아 쩡쩡 휘둘렀다
사슴은 제 뿔을 바위에 짓부수며 울부짖었다
꽃은 진액으로 손을 끈끈히 적셨다
때가 아닐 땐 모두가 무섭게 용감했다

노인 초상은 상주들도 피식피식 웃는다
조객들도 떠들썩하다 취하고 화투를 친다
달구질도 우렁차다
모두가 자연이라 받아들이는 때
매달릴 곳 놓친 잎새들만 골짜기에 엎어져 운다
때 맞춰 날아오는 기러기떼 끼룩끼룩

  개와 곰과 뱀과 멧돼지와 사슴과 꽃들. 이 살아있는 것들의 꿈틀거림. 아마도 그것들은, “때가 아닐 땐 모두가 무섭게 용감했다”라는 단 하나의 의미를 향해 얌전히 모여든 무수한 예들 중의 일부로 설정된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개와 곰과 뱀과 멧돼지와 사슴과 꽃의 이 필사적인 움직임이 너무도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져서, 정말로 이 현란하고 힘찬 풍경들이 “때가 아닐 땐 모두가 무섭게 용감했다”라는 단정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와 곰과 뱀과 멧돼지와 사슴과 꽃들은, 코앞에 닥친 때 이른 죽음에 대해서만 필사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의 의미로 요약하려는 인간의 의도로부터도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는 듯이 보여요.

  사실 ‘때가 아닐 때’와 ‘제때’를 구분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제때’라고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 인간들은 그것을 “자연”이라 받아들이며 피식피식 웃고 화투로 밤을 새우지만, 도대체 뭐가 자연이겠어요? 정작 잎새들은 때가 되어 떨어지는데도 바닥에 엎어져 울고 있는데요.   이 시의 언어들은 ‘때가 아닐 때’와 ‘제때’를 구분하고,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식으로 단정될 수만은 없는 세상의 자잘한 디테일들로 이 경계를 지우는 듯 합니다. 경계를 만들었다 지웠다 하는 이 움직임이, 이 시를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이고 비장한 듯 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 신지연(시인·기초교육대학 교양작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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