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노동당 황장엽 비서실장의 망명요청이 있었다. 분단 이후 북한의 최고위급 망명에 남북은 물론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사회부에서는 황장엽 망명 사건이 가져올 남북 관계의 변화를 전망해 본다.

  얼마전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중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요청한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남겼다. 이 사건은 분단 이후 발생한 북한 최고위 인사의 망명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당사자의 한 쪽인 중국의 입장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또 한반도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해 당사국들에도 큰 놀라움을 선사했다. 무엇보다도 북한 당국은 이 엄청난 사태 앞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황장엽은 북한정권과 북한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한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자 그 발전의 과정을 돌본 북한 최고의 이념가이다. 김정일의 스승이었던 그의 망명은 북한 체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었고, 북한 당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였다.

  황장엽의 망명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그가 신상 발언에서 밝힌 대로 사회주의의 이상을 포기하고 부자 세습의 봉건사회로 전락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인민들의 굶주림 앞에서 인민의 낙원을 건설했다고 강변하는 권력자들의 기만에 대한 분개, 또 이를 폭로하고 남한 당국과 협상해 통일을 앞당겨보겠다는 민족애 등의 동기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동기만으로 그의 망명을 이해하기에는 그 언사가 너무 낭만적이고 순진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정치적인 눈으로 볼 때, 그의 망명 동기는 최근의 북한 권력 동향과 무관하지 않다. 김일성이 죽은 후 북한에서는 외부에서 감지하기 힘든 권력 투쟁 내지는 권력 조정의 과정이 계속돼 왔음에 틀림없다. 최근에 나온 소식들에 의하면, 군부 지도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포진해 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다고 한다. 또 김정일의 권력 장악도 순조롭지는 않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장엽같은 구세대 인텔리들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망명 후 황장엽은 김일성의 사망을 유발한 심장마비도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 준비를 둘러싸고 벌어진 김정일과 황장엽의 대립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 사망 전에 이미 북한에서는 황장엽과 같은 연성의 이론가들이 설 땅이 협소해졌다고 볼 수 있다. 대남 정책에 관한 김정일의 태도는 분명히 황보다 강경하며, 그는 황 비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장엽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초기 이상주의가 빗나간 데서 온 절망감이 그의 망명을 촉발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의 망명 사건은 당분간 남북한 관계를 경색시킬 가능성이 크다. 북한 당국은 초기의 강경 정책을 포기하고 그의 망명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양자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중국 당국이 남북한 사이에서 어물쩍한 태도를 취한 결과 이 사건은 장기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황을 조속히 귀국시키도록 외교당국은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인 관계 악화보다 황장엽의 망명은 향후 남북한 관계의 변화에 대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망명은 이제 북한 체제가 그대로 존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식량부족으로 북한 체제의 물리적인 기반이 흔들린 것은 벌써 오래된 일이다. 그의 탈출은 이제 북한 체제가 그 이념적 기반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일부 엘리트층에 국한된 것일지 모르지만, 최근 잇따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탈출은 체제 붕괴의 전조로 간주될 수도 있다.

  북한의 체제를 여전히 받치고 있는 것은 강한 군사력과 군의 충성, 그리고 사상과 정보가 통제된 주민들의 순응, 이 두가지이다. 이 두 요소가 가까운 장래에 소멸할 가능성은 크지 않고 따라서 북한 체제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물적 기반도 상실하고 이념적 기반도 흔들리는 체제가 군사력과 주민 통제만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든지 체제의 성격을 바꾸든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이루지 않는다면 북한 체제는 장기간 지속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북한 체제는 이 둘 중 어느 것도 이룰 수 없게 돼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방을 해야 하고, 개방을 하면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의 북한 정권은 개방 개혁을 시행할 능력도 없고 체제를 스스로 바꿀 능력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북한 체제는 무너져 버리거나 대폭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는 남한 체제로의 흡수통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제는 남북한 정부가 대등한 위치에서 통일 논의를 하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 돼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외교적으로는 두 정부가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인민들까지 가까운 장래의 국민으로 간주하고 대북한 정책을 펴야 할 때가 왔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지원도 장래의 국민들에 대해 미리 지원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통일 정책과 대북한 정책도 이제 이런 기조 위에서 이루어지고 시행돼야 한다. 그것이 통일의 비용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은 이러한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김영명(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