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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길- 신경림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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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6.01  17: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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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길                                             - 신경림

길을 가다가
눈발치는 산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갈대 서걱이는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산길을 가다가
산길 강길 들길을 가다가
내 손에 가득 들린 빨간 열매를 본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울어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요? 간첩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시골교회에 달린 작은 방을 내준 늙은 목사는 체머리를 흔들며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관사로 사라졌다. 초췌한 차림도 그렇거니와 땀내로 범벅이 된 나를 하나님의 옆방에 들게 한 것이 신경 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그네에게 선뜻 방을 내준 허리 구부정한 목사는 그의 아버지 말에 충실한 사람인 셈이었다.

  부엌이 달린 작은 방에서 개수대에 물을 받아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면서 내 온몸의 신경들이 50킬로를 걷는 동안 숨죽였던 촉수를 내밀고 있었다. 아이쿠, 통증이 산발했다. 몸을 닦는 일이 더뎌지더니 결국 창밖엔 어스름이 깔렸다. 치르르 울리는 찬기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리 잡았다. 약상자를 꺼내 쓸린 어깨와 사타구니에 파우더를 발랐다. 미세한 통증에 솜털들이 꼿꼿이 섰다. 속물집이 터져 피가 흐르는 상처위에 마취제를 뿌린 후 피부를 잘라내고 약을 바른다. 그새 솜털들이 웃자란다. 노파심에 우루사와 비타민 한 알 집어 삼키고 침낭 속으로 몸을 뉘였다.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은 먼 길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혼자 떠나는 내게, 도보여행의 의미를 사람들은 묻는다. 어떠한 쾌락이라도 길 위에 있나요? 삶의 의미라도 찾게 되나요?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있어봤자 욱신대는 관절과 뻐근한 근육, 물집 터져 피 묻은 양말들뿐이다. 그래도 혼자 걷는 건, 잊었던 상념들을 하나둘씩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꺼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뒤죽박죽 상념들은 걸을 때마다 용케도 투욱툭 제자리를 잡는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잃어버린 옛 이야기와 날아가 버린 꿈들, 헤어진 친구와 잊혀진 꿈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들은 산길에서, 강길에서, 혹은 들길에서 문뜩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마치 죽은 친구가 나를 부르듯.

  겨우 오후 일곱 시인데 차오르던 산마을의 어둠은 방안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언제 잠이 들었나. 노크 소리에 눈을 떠보니 성긴 백발의 노 목사는 찐 감자가 담긴 그릇을 놓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라진다. 봉창 사이로 번진 달빛아래 나는 얇디얇은 감자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다. 그래 이 맛이다. 이 맛에 걷는다, 나는 속삭였다. 나는 그렇게 길 위에 있었다.
            
/ 이현준(소설가, 現 철학과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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