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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칼과 칸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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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0.31  15: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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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칸나꽃

최정례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울음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 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이른 가을, 칸나꽃을 줄기 채로 베었다. 지고 있는 칸나꽃은 마치 ‘나를 차라리 베어주세요’하고 간곡히 간곡히 부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째서일까. 지난 여름 칸나의 꽃잎은 강렬한 피처럼 붉었다. 푸른 싱싱한 잎사귀, 단단한 줄기에서 뿜어나오는 자신감이 가을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가을 바람은 칼날을 쥔 일종의 권력과도 같았으며, 칸나가 시들어 가는 것은 어쩌면 꽃의 굴욕 같았다. 내가 겪었던 굴욕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리 베자. 그래서 나는 칸나를 단칼에 베었는지도 모르겠다.

칼과 칸나꽃. 시인은 칼에게 자신의 목을 들이댄다.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고, 시인은, 혹은 시인의 슬픔은 칼과 사이에 놓인 시들어가는 칸나꽃으로 전이된다. 슬픔을 삭이는 데는 오래 간다. 문을 닫고 몇 날 몇 일을 끙끙 앓기도 한다. 시인의 말처럼 첫날도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결국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쓰러지거나 무너지는 길 밖에는 없을 것이다. 쓰러지려면 칸나꽃처럼 쓰러지자고 시인은 다짐한다. 그래야만 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칸나꽃의 단단한 알뿌리처럼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만큼은 여름 칸나꽃처럼 붉고 모질다.

/ 이인자(국어국문학과 97년 졸업, 유웨이중앙교육 홍보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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