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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동백꽃이 피어 퍼드러지기 시작했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도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해지면서 유정을 떠올림은 축복인가 설움인가. 유정은 그 누구보다도 봄을 사랑하고 봄을 기다리던 작가였다. 그가 남긴 30편 남짓한 단편
가운데 봄을 무대로 한 작품이 8편, 여기에 역시 봄을 소재로 한 4편의 수필까지 포함하면 유정은 가히 ‘봄의 작갗라 불리어도 무방하리라.
유정의 작품활동은 5∼6년에 걸쳐지는데 특히 그가 봄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봄밤」, 「봄봄」)부터이고 집중적으로
봄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병환 중에 있었던 1936, 7년 경의 일이다.
왜 유정은 봄을 소재로 한 글에 집착했을까. ‘봄이 오면 날이 화창할 게고¸ 보드라운 바람에 움이 트고 꽃도 피리라. 만물은
씩씩한 소생의 낙원으로 변할 것이다’(수필, 「행복을 등진 정열」)라고 한 것을 보면, 유정은 봄날을 화창한 가운데 건강한 생명이 흘러 넘치는
낙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봄을 소재로 한 유정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씩씩함과 명랑함을 잃지 않는다. 「봄과 따라지」에서는 겨울
동안 움츠렸던 조그만 몸뚱이가 녹고보니 여기저기 가려움증을 느끼게 된 어린 거지의 익살스러운 모습과 맛난 음식을 향한 그의 소박한 꿈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유정의 자전적 소설인 「따라지」, 「심청」, 「연기」들에서는 실업자의 비애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봄날의 명랑함이 글
전체 분위기를 어둠과 고통스러움 속에 남겨두지만은 않는다. 특히 사지골 꼭대기에서 사구라꽃(벚꽃)과 개나리와 복숭아꽃을 배경으로 「따라지」의
집주인 노파와 세입자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은 명랑한 일대 활극으로 펼쳐져 「봄봄」의 장인과 사위 사이의 활극을 연상시킨다.
카페 여급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봄밤」, 「따라지」, 「야앵」에서 영애는 뚱뚱하고 못생겨서 애인을 얻지 못하지만 심덕이
곱고(「봄봄」과 「동백꽃」에서 점순이 조숙하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뭉태가 날건달로 설정되는 것과는 다른 유형이다), 「따라지」의 아키꼬는
톨스토이를 사랑하지만 톨스토이는 신경질쟁이 누님 밑에서 소설공부를 한답시고 여성의 사랑에 둔감하다. 톨스토이의 둔감증은 「동백꽃」의 일인칭
화자를 연상시킨다. 「야앵」의 성숙은 창경원의 밤벚꽃 놀이에 나갔다가 2년 전에 잃어버렸던 딸을 찾고 아울러 그 딸의 애비인 전남편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유정의 봄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명랑함과 익살스러움은, 유정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졌던 가난과 병고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간절한 소망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까.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방탕한 형님 밑에서 보내야 했었던 그의
사춘기 시절의 아픔,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던 말더듬이로서의 천형(유정은 흥분하거나 긴장하면 말을 더듬었다),
춘천을 떠나 생활한 지 오래 되었으면서도 춘천 사람들과 춘천 산천을 그의 작품속에서 형상화했던 것도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부모님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보면 유정은 사랑과 문학을 위한 사도였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기록이라는 친구의 말에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기록이다(안회남, 「겸허 김유정 전」에서)’라고 유정은 대답했다. 유정에게서 사랑이란 나와 남 사이의 벽을 허무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의사소통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유정은 자신과 세계 사이에 의사소통을 원했다. 유정은 음성언어 대신 문자언어를 선택했다. 그것이 그의
문학활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능청스런 언어구사와 운율을 살린 어휘선택, 서술의 입체적 구성 등은 모두 언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남다른 언어에 대한 애정과 천착의 결과였다.
병환 중의 유정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자신이 살아 남기를 원했다. 사랑을 전하면서 살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봄을 소재로 한
작품의 창작에 집중됐다. 그는 자신의 병이 위중한 순간에도 창작활동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것이 유정의 생명을 졸아부쳤다. 1937년
3월29일, 그 아름다운 봄날 새벽, 유정은 세상을 떴다. 그래서 유정의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봄날은 아름다운 만큼 서러운 마음의 골도
깊다.
/ 유인순(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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