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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무엇이라고 쓸까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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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2.04  16: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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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고 쓸까 -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11살이 되던 겨울 무렵, 누나는 전라도 진도에 숨어있었다. 거의 1년이 넘었던 그 숨바꼭질에서 누나가 돌아오기까지 난 누나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두서없이 섞인 인쇄물들과 거친 제목들이 가득한 책들을 배를 깔고 구경하던 일은 사뭇 매력적인 일이었다. ‘소공녀’ 같은 책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누나의 책들이 뭘 말하는지 금방 깨닫지는 못했지만, 누나 방에 있을 때면 난 이유모를 두려움과 흥분을 느끼곤 했다. 광주의 사진들이 찍힌 인쇄물은 마치 잔인한 그림책 같아서 나는 내방 서랍에 가져다 놓고는 언제쯤 친구들에게 보여줄까 시기를 고르기도 했다. 미군부대에서 주어온 도색잡지를 놀라운 눈으로 구경하던 친구들에게, 좀 더 으스대며 보여 줄만한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도 그 사진들이 전하는 두려움은 고스란히 전해졌고 난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경찰관들의 급습에 급히 누나의 물건들을 마룻바닥에 숨겨 놓던 날, 난 내 방 서랍의 종이들이 집안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이후로 나는 누나 방에 들어서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누나가 지명수배에 풀려 집에 돌아오던 날까지도 괴물이 사는 동굴을 피하듯 누나 방을 애써 외면했었다.

 

이후 거의 20년의 시간이 지나 난 강은교 시인의 시를 보았다. 왜 이 시를 읽으면서 고스란히 11살의 겨울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누나의 노트에 빼곡히 적혀있던 그 시들 중에 하나였는지도 모르고, 시인의 마음에서 그 시절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바른말을 하면 죄가 되던 70년대에 여자의 몸으로 이런 시를 써내려갈 수 있었던 모습에서 누나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시인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 이래저래 불편했을 시절, 펜을 쥐고 있는 자는 누구나 잉크대신 피를 찍어 쓰는 글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 글이 어떤 이유로 써지든, 외면당했든 말이다. 이젠 사람들이 자신의 피를 찍어 쓰지 않아도, 양심을 저울질 하지 않아도, 누나처럼 도망 다니지 않아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행복한 시절이기도 하지만, 그 말들의 가벼움에 난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강은교 시인처럼, <무엇이라고 쓸까>라는 고민이 진실과 거짓의 저울질이 아니라, 오직 돈과 인기를 위해서라면 우리 시대는 더 뒷걸음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하려다가, 중학교 사회선생에게 얼굴이 붓도록 뺨을 얻어맞았던 그 날이, 그나마 내가 용기 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현준(소설가ㆍ現 철학과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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