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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사랑vs돈, 잔인한 에로티시즘의 미학
신혜경 교수  |  shinh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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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5.26  14: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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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피슬 <나쁜 소년>(1981)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이번에 감상할 작품은 또 다른 가정을 보여주는 ‘잔인한’ 에로티시즘, 특히 198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몰락과 사춘기 소년의 성적 방황을 보여주는 에릭 피슬(1948-)의 작품이다. 닫혀진 블라인드의 틈새로 스물스물 스며드는 햇살, 그 햇살이 허물처럼 얼룩진 침대 위에 벌거벗은 한 여인, 술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성적 흥분에 도취된 것일까. 여인의 얼굴은 옆으로 젖혀져 있고 다리는 묘한 자태로 벌려져 있다. 그리고 여인의 발치에 서 있는 한 소년, 여인의 아들일까 아니면 여인과는 어떤 관계일까. 소년은 여인의 은밀한 몸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소년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여체에 대한 호기심어린 응시가 아니라 여인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있는 행위다. 탁자 위에는 풍요로운 중산층 가정의 단면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탐스러운 과일 바구니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피슬에게 성은 고독한 자기발견과 자기투영의 수단이다. 그의 그림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춘기 소년의 이미지는 청소년의 성적 관심과 탐색보다는 바로 그들의 상처받기 쉬운 특성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피슬의 그림은 모든 중요한 인간관계에 내재되어 있는 실존적 교착상태를 다룬다. 이 그림 속의 두 인물은 서로 소외된 채 아무런 인간적 소통도 나누지 못하며, 그것을 보는 우리 또한 그림 속 누구와도 교감하지 못한 채 철저하게 단절된 방관자로 남아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성은 이러한 모든 상황이 냉정하리만치 차갑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작가의 주관적 감정의 개입이 극단적으로 배제된 그의 회화는 바로 그러한 냉정함과 무표정함에서 비롯되는 알 수 없는 비관성과 긴장감을 전달해 준다. 현실에 대한 지독한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냉소주의는 현실은 이제 이런 것이니 우리에게 꼼짝 말고 순응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에릭 피슬의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흐름 속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하지만,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것을 2차 대전이래 출현한 후기산업사회 혹은 소비사회와 관련시킨다. 새로운 유형의 소비와 퇴폐성,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패션과 스타일 변화의 급격한 리듬, 삶의 전 영역으로의 광고와 텔레비전 및 미디어의 침투, 거대한 초고속도로망의 발전과 자동차문화의 도래, 이 모든 것들이 본격적인 모더니즘이 침투해있던 이전과는 급격한 단절을 보여주는 특징들이다. 여기에서 제임슨은 과거의 모더니즘이 대항적 예술, 즉 20세기 초반 중산층사회의 지배적인 현실원칙과 행위원리에 대한 도발적 도전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기존질서에 대해 공격적이었던 모더니즘 예술과 달리 그러한 모더니즘의 파괴성이 중화되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그것은 모더니즘의 작품이나 그 형식적 특징들을 이용한다하더라도 더 이상 현실 변혁적이지 않으며, 그 모든 것들이 상업적으로 무난히 이용되고 다원성이라는 이름 하에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피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뭔지 모를 비애에 젖곤 한다. 그것은 단지 피슬이 그려내는 현대 사회와 인간의 실상에 대한 냉혹한 시선 때문만이 아니라, 더 이상 시대의 개혁자이자 비판가를 자처하지 않는 예술의 운명에 대한 씁쓸함 때문이기도 하다.

/ 신혜경(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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