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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시린 눈으로 뒤돌아보라어느 테러리스트를 추억하며
신혜경 교수  |  shinh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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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8.23  15: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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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하르트 리히터 <어느 소녀의 초상>(1988)
 
 흐릿하게 초점이 흔들려 버린 사진처럼, 혹은 아련하게 빛바랜 옛 추억의 그림자처럼, 뭔지 모를 애잔한 기억과 음울한 역사의 흔적이 느껴지는 이 작품.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작가라 인정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어느 소녀의 초상>이다. 아마도 이 작품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한림학보의 인쇄품질을 탓하며 화질이 형편없다고 투덜댔을지 모른다. 혹은 상상력이 풍부한 학생이라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초점을 흘려버렸을 거라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사진이 아니라 회색 톤으로 그려진 유화다. 1970년에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88년에 리히터는 원본사진의 이미지를 흐릿하게 지운 듯한 이 그림을 15개 흑백회화 연작 <1977년 10월18일> 속에서 그려냈다.

 그렇다면 <1977년 10월18일>이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며, 과연 이 작품의 주인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이 그림 속의 여성은 울리케 마인호프(1934-76)라는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이다. 그녀는 좌파 잡지의 편집장이자 칼럼니스트로, 30대 초반에 이미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안정을 모두 얻었다. 베트남전에 대항하는 반전반미투쟁과 핵무장 반대에 앞장섰던 마인호프는 바더와 그의 아내 엥슬린을 만나면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전투적인 테러리즘에 가담하게 된다. "너희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는 구호 아래, 폭력이 낳은 억압을 부수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되었다. 이들이 결성한 그룹이 바로 <바더-마인호프 집단>이며, 이후 <적군파>라는 테러리즘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철저한 이론적 무기를 갖춘 지식인들이었는데, 은행을 털어 행동자금을 마련하고 폭탄테러, 백화점 방화, 요인납치와 살해 등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1972년에 마인호프와 바더를 포함한 1세대 적군파 대원들은 거의 모두 경찰에 체포되는데, 이들의 탈출과 석방을 위해 2세대 적군파 요원들의 테러가 극에 달하면서 이른바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1977년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특히 10월에는 11명의 적군파 포로 석방을 요구하면서 루프트한자 여객기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는 독일특수부대의 기습작전으로, 인질범들의 사살과 함께 7분 만에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이 날이 1977년 10월 18일이었다. 이날 밤 감방 안에서 적군파 지도자 세 사람은 모두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엥슬린은 목을 매고 바더와 라스페는 총상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어떻게 이들이 삼엄한 감옥 안에 총기를 입수할 수 있었는가는 의문으로 남았다. 그러면 마인호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72년에 체포된 마인호프는 재판이 계속되던 1976년 어느 날 새벽 감옥에서 수건으로 만든 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옥의 의사는 "자신이 구현하려는 이념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녀는 삶을 포기했다"고 적어 넣었다.

 리히터의 연작 <1977년 10월18일>은 이러한 1세대 적군파들의 비극적인 최후와 관련된 사진들을 교묘하게 흘려버리는 방법으로 다시 그린 일련의 회화작품들이다. <어느 소녀의 초상>은 마인호프가 테러리즘에 가담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에서 그는 사진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흑백의 회화는 초점을 잃어버린 사진과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그러면서도 그가 드러내는 이미지는 회색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이다. 흑백과 흐림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몰입이 아니라 거리를, 어떠한 각성이나 흥분을 철저히 차단한다. 그러한 거리를 통해 우리는 잊혔던 역사의 상흔을 다시금 돌이켜 보는 것이다.

  리히터는 마인호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과 교훈을 우리에게 제공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쉽사리 잊어버리거나 깊은 상실감에 지친 침묵 속으로 빠져들 때, 그는 역사의 낡은 서랍 속에 묻혀있던 음울한 편린들을 끄집어내어 다시금 우리 앞에 내던져놓는다. 아직도 테러리즘이 횡행하는 시대에, 리히터의 작품은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깨우치는 것이다.

/ 신혜경(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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