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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모과 썩다
김원국 작가  |  diedli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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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9.08  14: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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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썩다
정진규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은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가장 최근에 지독하게 화가 나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던 건 언제였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뭔가 그럴 듯하고,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현실은 달라요”라서, 내가 가장 최근 지독하게 화가 났던 것은 명동을 2시간 동안 헤매서 겨우 고른 9만 6천 원짜리 청바지를 그날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 두고 내렸을 때이다. 그때 내 손에는 청바지 대신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가 들려있었다(공포소설이다). 맙소사.

살다 보면 의외로 애정이나 민감한 감정들, 인간에 대한 믿음의 배반, 죄책감 등이 아니라 돈이나 시험, 평가 등에서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 가슴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던 실연의 아픔이 어느새 유행 지난 프로그램처럼 뚱~하니 와 닿지 않게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이를 놓쳐버린 아픔을 마취시키고자 알코올 같은 걸 부어가며 노래 부르던 젊은이가, 새로 산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가슴 아파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뭐 적응해야지 어쩌겠는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제 3자의 눈은 한 가지에 주목한다. 그가 얼마만큼 망가질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누구는 첫 담배를 그때 빼어 물고, 누구는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뒤 가혹할 정도로 살을 빼기도 하고, 또 누구는 그 가혹할 정도로 살 빼는 남자가 사귀었던 여자가 자신의 짝사랑이었음을 되새기며 긴가민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누구는 매일 술을 퍼 마시고, 누구는 이후로 사랑을 장난감 취급하게 되며, 누구는 염세적이게 된다. 그리고 보통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쇠도 불순물이 섞여야 더 단단해진다고 한다. 합금이 강한 이유다. 그러므로 첫사랑에 실패한 이들이 빨리 썩어버리는 건 이해가 가지만, 자신을 학대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왜 그럴까. 배신이나 실패를 겪은 뒤 우리는 “타락해버려야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마치, 지금껏 억지로 힘들게 타락하지 않고 버텨온 것처럼. 그런 기분, 침을 뱉고, 누군가를 때리고 싶은 기분을, 청바지를 두고 내렸을 때 느꼈다, 나는. 맙소사.

그러니까 내가 10년 전 첫사랑의 기억을 새삼 되돌린 것이, 9만 6천 원짜리 청바지와 주말 2시간을 잃어버리고 잔뜩 화가 났을 때라는 점에서, 역시 나도 빠르게 썩었구나, 라고 느낀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손톱까지는 뽑아줄 정도로 좋아했던 사람을 잃은 통증이, 주말의 2시간과 9만 6천원으로 환산될 정도라니.

아픔을 심하게 겪은 사람은 더 강해진 척 하지만, 더 약해진 경우가 많아서 다시 사랑하기가 힘이 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떤 상실에도 덤덤해지도록 초인의 심장으로 이식수술을 감행하기도 한다. 어차피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는 것이 얼마나 손해인지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감정을 잘 통제해서 상실의 아픔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건 물론 아주 멋진 일이다. 다만 이런 사람은 앞으로… 다이아몬드가 잔뜩 박힌 3억 4천만 원짜리 청바지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첫사랑을 떠올리진 못할 것이다.

잔뜩 아프고 화가 나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도는 건, 10년에 한 번씩 청바지를 잃어버릴 때마다, 개기월식 후에 새삼스레 바라보는 달처럼, 생각날 사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아직 더 썩을 부위가 남았음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김원국(시인ㆍ국문학과 05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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