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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아름다운 천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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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12.03  1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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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천 - 박재삼

나는 그대에게
가슴 뿌듯하게 사랑을 못 쏟고
그저 심약한, 부끄러운,
먼빛으로만 그리워하는,
그 짓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엉터리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그런 짝사랑을 보배로이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짠
아름다운 천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
이 가을,
갈대 소리가 되어 서걱입니다.
가다가는 기러기 울음을
하늘에 흘리고 맙니다.

학창시절 내 별명은 잠시잠깐 노숙자였다. 뭐, 캠퍼스 어디나 누울 자리만 있으면 얼굴을 신문지로 덮고 낮잠을 자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 별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친구들이 조숙하다 못해 노숙하다며 붙여준 별명이었다. 특히 당시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근 10년의 나이차에도 나의 짝사랑은 꽤나 심각했다. 수업노트에 강의내용보다 낙서가 더 많던 그 시절에, 낙서의 대부분이 그 사람에 관한 것일 정도였다. 박재삼의 <아름다운 천>이란 시도 당시에 내 노트에 적혀 있던 시중에 하나였다. 그러니 아직도 난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지금의 성호관 강의실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곤 한다.

당시 나는 문학수업만 골라듣는 편식쟁이였다. 1997년 가을에도 어김없이 내 시간표에는 문학수업으로 가득 차 있었고, 문제의 수업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란 당시로선 파격적인 이름의 수업이었다. 그 첫 수업이 있던 날, 난 멍하니 성호관 창문 밖 풍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런 내 눈에 한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깡충거리는 듯한, 어딘가 특이한 걸음새로 건물 쪽으로 다가오던 여자는 잠시 멈춰 서서 안경을 슬쩍 고쳐 잡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랍게도 여자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학생들은 혹시 책판매원이 아닌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강의를 하러 온 교수란 사실에 잠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난 그 틈을 타 맨 뒷자리에서 앞자리로 자리를 이동했다. 뭔가 내게 인연이 왔다고 단단히 착각했던 것이다. 그 날부터 나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활활 타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길고 따분한 그 사실주의 소설들을 일주일에 두 세권 씩 읽어치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열정 탓이었고, 당연히 그 열정은 짝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가을동안, 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조금은 달떠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은 수업시간에 소개받은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의 소설에 빠져있었고, 수업시간엔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얼굴에 빠져들곤 했다. 너무 가까이 앉다보니 선생님의 침샘 분비물이 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굳이 닦으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열꽃이 피고 지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다지만 내 열꽃은 그 후로도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다음 해 봄에는 내 마음 전할길이 없어 활짝 핀 하트 모양의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 먹으며 그 쓰디 쓴 맛을 사랑의 맛이라 할 정도였으니 정신까지 오락가락 할 정도였다. 다행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열꽃은 그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지만 이후로도 난 꾸준히 답장 없는 메일을 선생님께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10년이란 시간이 지나 이젠 그 꽃잎들이 책갈피 사이의 화석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인연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난 선생님과 새로운 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선생님과 편안히 마주앉아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안주삼아 이러쿵저러쿵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두 번 술을 마실 때 마다 난 내가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다른 모습에 또 다른 느낌으로 선생님을 내 맘에 받아들이고 있다. 술이 취해 지난 사랑이야기를 독백처럼 내뱉는 모습에 내가 같이 마음이 아팠던 것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며칠 전 선생님과 술을 마시고 어김없이 술병에 몸져누운 날, 나의 10살 어린 좋은 여자친구는 입을 빼죽 내밀곤 선생님과 술을 마시면 오빠는 꼭 앓아눕는다고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하긴 그 이유는 다르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날 앓아눕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나요. 박혜경 선생님.

/ 이현준(소설가 現 철학과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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