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교양
[시가있는하루] 냉이꽃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8.03.08  11:19:1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냉이꽃
                                               안도현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보일 듯 보일 듯 냉이꽃이 피었다
너하고 둘이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4월이 되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냉이꽃이다. 말 그대로 온 사방에 지천이다. 무심코 지나쳐서 그렇지 냉이꽃 한번 발로 밟거나 꺾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다지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꽃을 피우면 별꽃과 냉이꽃이 약속이나 한 듯 1,2주를 사이에 두고 땅에서 솟아난다. 마치 마술 같아서 신이 땅 위에 넓은 마술보자기를 씌어놨다가 한순간에 휘리릭 걷어 낸 것만 같다. 그러다 보니 4,5월에는 아이들과 씨알의 터에 나가 커피를 마시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꽃에 커피를 주거나 모가지를 꺾어 책갈피에 넣는 몹쓸 짓도 했지만, 살랑바람에 흔들리는 꽃물결에 마음을 사로잡혀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워낙 작은 미세 꽃들이라 그 존재를 깨닫기 쉽지 않지만, 한번 깨달으면 평생을 두고 봄만 되면 시멘트가 덮지 않는 모든 땅에 피는 그 꽃들의 존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은연중 그 꽃 같은 존재이길 바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난 지난 4년 반 동안 한림대 철학과 조교로 살았다. 내가 80년을 산다고 해도 인생의 5퍼센트에 가까운 긴 시간을 이곳에 있었던 셈이다. 30대의 나이에 조교를 한다는 것이 때로는 통증과 난처함을 주기도 했지만, 내가 보내온 세월이 주는 힘이 나를 여유롭고 편안하게도 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길 난 바라고 또 바랐었다. 안도현의 시 속의 냉이꽃 처럼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는 곳마다, 약속 없이도 날 찾는 순간에도, 질문이 없어도 먼저 답을 주는 조교이길 바랐다. 필요이상의 따뜻함이 아이들을 버릇없게 할지라도, 나의 불편함이 아이들의 편안함이 되길 바랐다. 술동무는 못되더라도 길동무는 되어주려 길가 어딘가에 보일 듯 말 듯 피어 있으려 했다. 하지만 ‘철학과 조교’란 명함을 벗어던진 지금 난 아이들이 나의 냉이꽃이였음을 새삼 깨닫고 있다. 냉이 꽃이 피고 하트모양의 작은 씨앗이 맺히면 바람에 흔들리며 아주 작게 들려주던 그 낫낫한 울림이 아이들의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조교를 그만두며 과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나는 내 냉이꽃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꼈다. 그래서 난 후회했고, 냉이꽃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음에 오래도록 가슴이 퉁퉁 부어올랐다.

봄이 오고, 자드락 땅 여기저기서 냉이를 캐는 아주머니들을 종종 보곤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누이들을 따라 겨우내 텅 빈 겨울 밭으로 냉이를 캐러 가곤 했다. 손위 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 작은 모종삽을 들고 보이는 모든 것을 캐냈고, 마음 좋은 누이들은 내가 캐낸 잡풀 사이에서 얼마 안되는 냉이를 추려냈을 것이다. 그날 향긋한 냉이된장국이 저녁 메뉴로 나오면 나는 내가 모두 캤다고 우기며 여러 그릇의 밥을 해치웠던 것 같다. 나는 그때처럼 이 봄에 향기 가득한 냉이국을 먹게 될 것이다. 너하고 둘이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 난 냉이를,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난 냉이를 말이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내가 없는데도 핀 이번 봄의 냉이꽃만은 영 보기가 힘겨울 것 같다. 내가 손대지 않았어도 만발할 냉이꽃에 행여 눈물 나지나 않을까. 그렇게 나의 4년 반이 갔다.

/ 이현준(소설가 · 국문과 박사과정)

이현준 작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보도] 한림대 수시모집 경쟁률 5.09대 1로 ‘3년 만의 상승’
2
[보도] 2023학년도 국가장학금 신청, 재학생 1차 필수
3
[보도] 코앞으로 다가온 졸업, ‘유예 신청’ ‘심사료 납부’
4
[보도] 4차 동아리 대표자 회의로 ‘유종의 미’ 거둬
5
[보도] 겨울밤을 수놓은 하나의 목소리, ‘한림합창단 정기공연’
6
[보도] ‘창의적인 아이디어’ 캡스톤 경진대회 실시
7
[기획] 1년 만에 부활한 총학, 4곳서 연장투표도 진행돼…
8
[선거특집] “학우들의 선택에 부응하는 학생회가 되겠다”
9
[선거특집] “내년에는 어느 해보다 빛나는 대학을 만들겠다”-학생회 당선인 한눈에 모아보기 1
10
[선거특집] “내년에는 어느 해보다 빛나는 대학을 만들겠다”-학생회 당선인 한눈에 모아보기 2
신문사소개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4252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학길 1 캠퍼스라이프센터 9-308호 한림학보사
제보 및 문의 : news@hallym.ac.kr / 033-248-287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지혜수(간사)
Copyright © 2005 한림학보. All rights reserved. news@hally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