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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 하루] 지는 봄꽃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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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14  16: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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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봄꽃 - 김 지 하

 

누구십니까

밤마다 이맘때면

늘 창가에 와 멎는 발걸음

누구십니까

 

쉰도 넘은 내 나이

연인일 리 없으니

아파트 안에선 볼 수 없는

달빛이라니까

혹은 별떨기이리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성실한 그이

무상한 그이

 

어느 해 봄

내 사랑을 읽고

 

울던 진달래 꽃밭

꽃들이 내 얼굴 간질여 위로하더니

 

오늘

지는 봄꽃이라니까

 

울적한 내 마음을 보아

그렇습니까.

 

문을 열자 골바람이 불듯 날 오달지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그 바람이 내 방에 살고 있었다. 어디론가 비집고 들어와 살던 바람은 문을 여는 기척에 놀라 내 피부 결에 맞물리며 오구구 달아나 버렸다. 난 바람이 어디로 들어온 지 이내 알았다. 살짝 열려진 창문, 그리고 그 너머로 멋진 춘천의 야경이 들어왔다. 필시 바람은 창틀에 걸터앉아 야경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늦은 밤에 방을 구하러 온 낯선 남자를 수상쩍게 바라보던 주인여자에게, 계약하자, 말했다. 바람이 살고 있었으니, 또 언젠간 방을 찾아올 것 만 같았다. 거기에 멋진 야경이라니, 딱 내가 찾던 그런 방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방과 연을 맺은 지 벌써 6년이다. 까탈스러운 주인집 여자도 친근한 친척뻘 이상이 되어버린 6년. 내가 그토록 오래 떠나지 못한 건 언제든 찾아주는 시원하고 질량감 있는 오종종한 바람 탓이었다. 봄이 오면 난 창틀에 걸터앉아 바람과 한께 야경을 보고는 했다. 멀리 고속도로의 끝자락과 의암호까지 보이는 그곳에서, 나는 오른쪽 시선 끝에 걸린 봉의산의 진달래 소식을 듣고는 했다. 구봉산 등선을 따라 멀리 남해에서 쉬지 않고 달려오던 진달래가 푯푯 꽃잎을 터트리면 나는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옛 생각에 빠지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까까머리 시절, 친구와 나는 어두운 밤 학교 뒷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둘은 그닥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엉뚱한 일이 있으면 가끔은 의기투합하여 일을 저지르는 독특한 사이였다. 그날도 우리는 하나의 목적으로 함께 모였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투가 들려있었고, 그 안엔 목숨을 걸고 구해온 소주 한 병이 들어있었다. 우린 우선 산 정상에 올라 소주를 한 모금씩 나눠마셨다. 처음 접해보는 짜릿함, 인상은 찡그려졌지만 그 묘한 맛은 내 인생에 문신처럼 뚜렷이 남아있다. 이내 우리는 행동에 들어갔다. 지천에 깔려있는 진달래꽃을 따서 소주병의 작은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투명한 소주병이 분홍빛으로 바뀔 때쯤 준비한 비닐과 끈 등을 이용해 소주병을 밀봉했다. 우리가 졸업하는 봄날에 근사하게 한잔 하자는 것이 우리의 유치한 꿍꿍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그해 봄날은 지는 봄꽃과 갔고, 우리가 졸업하는 봄에도 우리는 술병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이미 뭔가 시시한 일처럼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런데 겨우 일 년이 지나, 그 친구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20살의 푸른 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떴다. 난 친구의 죽음에 센티해져서 혼자 학교 뒷산을 올랐다. 하지만 3년 만에 우거진 풀숲은 내게 술병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고, 그렇게 술병은 기억 속 추억만으로 남겨졌다.

봄이 오고, 고향 집 베란다에는 이른 철쭉이 꽃을 피웠다. 늦은 밤 혼자 거실에 있다 보면, 진달래도 아닌 철쭉에 괜스레 가슴이 시큰해진다. 어쩌면 16층 창가에서 친구의 실루엣을 본 듯도 했다. 이제 곧 진달래가 피면, 나는 다시 내 원룸의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과 함께 봉의산을 내달리는 진달래를 훔쳐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 지는 봄꽃을 보며 울적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15년도 넘었을 그 진달래꽃술을 꿈에서 나마 홀짝일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 이현준(소설가 ․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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