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일본의 한류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대도시에선 한국인 배우들의 사진과 포스터가 넘실거리고 거리 곳곳에서 흥겨운 K-팝이 울려 퍼진다. 얼마 전엔 후지 TV의 한국 드라마 방영이 도를 넘어섰다며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후지 TV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를 향한 시선을 과거와는 180도 바꾸고 있는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지난 2009년 일본으로 연구년을 다녀온 언론정보학부의 심훈 교수가 일본에서 1년간 겪은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집필한 ‘신일본견문록’을 이번 학기 동안 한림학보에 게재하기로 했다. 다음은 그 첫 번째 원고.

‘다크 시티’란 영화가 있었다. 지난 1998년 개봉된 SF 미스터리물로 ‘아이로봇’(2004)의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주인공인 존 머독(루퍼스 스웰 분)은 자신이 낯선 호텔의 욕조 안에 누워있음을 깨닫는다. 곧이어 주변의 어지러운 정황을 통해 자신이 잔혹한 연쇄 살인범으로 수배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지난 일들에 대한 기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수사관의 집요한 추적을 받으며 영화 내내 어두침침하기만 한 도시에서 그가 마침내 밝혀내는 진실은 외계인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실재(實在)하지 않는 기억들을 심은 후, 그들의 행동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마지막에 펼쳐지는 반전(反轉)은 그를 비롯한 ‘다크 시티’의 시민 모두가 기실은 우주 공간에 마련된 세트장에 납치돼 외계인들의 실험 대상으로 관찰돼 왔다는 사실이다. 워쇼스키 형제들이 감독한 SF 영화 ‘매트릭스’보다 불과 1년 전에 나온 ‘다크 시티’는 비록 흥행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인류의 기원에 대한 단상(斷想)을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당시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 ‘지구’라는 실험장에서 인류를 연구했다면 각각 상반된 조건 아래 설치됐을 무대가 바로 미국과 일본이라는 생각이다. 지진과 태풍은 물론 홍수와 쓰나미 등 지구상의 온갖 악조건들을 우겨 넣은 열도(列島)에 수많은 인간들을 떨어뜨린 곳이 일본이요, 반대로 광활한 대지에 몇 안 되는 이들을 마음껏 풀어놓은 곳이 미국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렇게 볼 때 ‘자율과 개성’이라는 스펙트럼의 양 극점에 위치하도록 강제된 이들이 다름아닌 미국인과 일본인들이다.

유학을 위해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1996년 당시, 시내 곳곳에 널려있던 공원과 어디서나 쉽사리 눈에 띄는 지평선은 풍부하고 저렴한 먹거리들과 어우러져 ‘어째서 미국인들이 이렇게 축복받는 환경을 갖게 되었을까?’라는 부러움 반, 질투심 반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2009년,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얻게 된 첫 번째 안식년을 맞아 이웃나라 일본을 찾게 되었다. 이미 두어 차례 일본을 여행한 적은 있지만 생활해 본 경험은 없었기에 일본에서 체류했던 1년간은 미국에서 얻은 충격과는 또 다른 쇼크를 안겨 주었다. 지인(知人)의 권유로 일본인들 틈바구니에 묻혀 살며 일본 소학교에 아이들을 보냈기에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그네들의 생활방식을 피부 깊숙이 체험하면서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하는 두 번째 의구심은 그렇게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리하여 외부인의 눈으로는 좀처럼—특히 ‘자율과 개성’이라는 스펙트럼의 최고봉에 위치한 미국인의 눈으로는 절대로—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단초(端初)를 찾던 중, 우리와는 너무 다른 지리적, 역사적 환경에 주목해 세 가지 중심축을 기준으로 일본의 좌표를 그려보게 됐다.

이번 학기에 소개하게 된 ‘신일본견문록’은 크게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자고로 동양에선 예로부터 천, 지, 인의 세 가지 기운이 한데 어울려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이름하여 삼재(三才) 사상이 그것. 이에 따라 필자는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네와 달리 범상치 않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을 가졌던 일본을 삼재 사상에 기대어 풀어 보았다.

돌이켜 보면,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기를 기원했던 한국인들의 소망은 일본에서 한낱 사치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무병장수(無病長壽)에 해당하는 일본의 ‘무병식재’(無病息災)란 사자성어(四字成語)는 그런 의미에서 장수는 바라지도 않거니와 그저 근심 없이 무병무탈(無病無頉)한 가운데 자연 재해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피재지’(被災地), ‘진재’(震災), ‘철포수’(鐵砲水) 등 우리 입장에서는 생경하기 그지 없는 재난 용어들이 TV 뉴스를 장식하는 일본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참고로, ‘피재지’란 재해를 입은 지역을, ‘진재’란 지진 재해를, ‘철포수’란 갑자기 밀어닥치는 홍수를 뜻하는 일본어들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그녀의 저서 「국화와 칼」을 통해 일본 문화의 정수(精粹)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보았고, 반일(反日) 세대인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에서 일본적 특징을 찾았다면 필자는 ‘생존 투쟁’에서 일본 문화의 독특성을 논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감히 베네딕트와 이어령의 반열에 은근슬쩍 오르고자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일본 문화의 해독 코드가 ‘생존 투쟁’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할 따름이다.

해서, 이번 학기에 연재할 ‘신일본견문록’은 태풍과 홍수로부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지진과 쓰나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무라이들의 칼과 군부 정권의 폭정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부끄러움’과 ‘죄책감’ 속에 ‘축소지향적인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인들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칼럼은 지구상의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남기 위해 약탈했고, 살아남기 위해 배신했으며, 살아 남기 위해 따돌렸고, 살아남기 위해 복종했으며, 살아 남기 위해 박수(신토 사상의 가장 중요한 의식)를 쳐야 했던 일본인들의 생존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번 학기 동안 연재될 칼럼은 지난 2009년 10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약 1년 7개월에 걸쳐 세계일보에 연재됐던 글들을 다시 추리고 가다듬은 것이다. 당시, 지면의 제약으로 미처 담지 못했던 낙수(落穗)들과 함께 소개하고 싶었던 관련 사진들을 간간히 추가함으로써 가급적 많은 이야기들을 다루고자 했다. 그럼, 다음 호에선 삼재 사상의 첫 단추인 ‘하늘’ 편을 통해 이웃나라 ‘태양의 제국’을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