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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견문록] ‘비와 홍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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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많고 다리 많은 우산 왕국
“신바시(新橋), 니혼바시(日本橋), 이다바시(飯田橋), 쓰이도바시(水道橋), 아사쿠사바시(淺草橋), 다께바시(竹橋), 에도가와바시(江戶川橋)••••••.” 모두 도쿄(東京)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이름에 다리가 들어가는 전철역들이다. 비가 많으니, 물이 많고, 물이 많으니, 자연스레 다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나라.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비 많고 물 많은 ‘다리의 왕국’이다.
연평균 강수량 1,718mm로 세계 평균인 973mm를 두 배 가까이 넘으며, 이웃나라인 한국(1,245mm)보다는 30% 이상 물이 많은 나라, 일본. 그렇다고 일본에서 비가 우리나라마냥 주로 여름 온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초봄부터 늦겨울에 이르기까지 한 계절도 쉬지 않고 지겹게 내리는 게 일본 비이기 때문이다. 해서, 우산은 일년 내내 열도인들이 챙겨야 하는 생필품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영국 신사하면 우산을 빼놓을 수 없다지만, 일본 역시, 우산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국가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우산 제조 기술을 보유한 데다 우산 보관대 등 제반 시절마저 완벽하게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 까닭에서다. 그러고 보면, 농사일이 법적으로 금지된 에도(江戶)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가장 쉽게 손 댄 부업(副業)이 우산 제조였다. 이러한 국가적 전통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접이식에서부터 초소형, 초경량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우산을 생산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런 저력은 또, 일본을 다녀간 한국인 관광객들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손쉬운 귀국 선물로 우산을 찾도록 유도하는 강점을 발휘한다.
도쿄 저류조는 1급 군사시설
열도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수천 년 동안 되풀이돼 온 폭우와 홍수는 적어도 물에 관한 한 일본인들에게 누구보다도 철저한 대책을 세우도록 강제해 왔다. 예를 들어, 도쿄를 관통하는 스미다(隅田) 강은 하천의 양안(兩岸)을 콘크리트 방벽으로 둘러친 데다 곳곳에 수문을 설치해, 시외에서 시내로 흘러 들어오는 지류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폭우로 넘칠지 모르는 강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낙수(落水)를 저장할 탱크까지 지하에 설치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도쿄 북서쪽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현 카수가부(春日部)시는 도쿄 지역에 집중 호우가 발생할 경우, 스미다 강이 범람할 것에 대비해 낙수 저장 탱크(저류조)를 지하에 마련하고 있다. 1급 군사시설로 지정돼 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견학이 허용되는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저장 용량을 자랑하며 폭우로 인한 스미다 강의 범람을 사전에 방지하고 있다. TV의 특별 방송을 통해 간간히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이곳은 5개의 수직 갱을 포함해 5층 높이에 해당하는 18미터짜리 기둥들이 텅 빈 지하 공간을 떠 받치고 있는 수조(水槽)로 구성돼 있으며, 해리슨 포드가 주연했던 영화, ‘레이더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초여름마다 동경의 장마 대비 시스템이 불안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일본 방송을 보노라면, 완벽을 추구하다 못해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는 일본인들의 철두철미(徹頭徹尾)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폭우로 숱한 사상자 낸 비극의 땅
돌이켜 보면, 천재(天災)의 왕국, 일본은 한반도인들이 상상도 못할 수재(水災)를 수천 년간 몸서리치게 겪어 왔다. 나름대로 호우 대비가 과거에 비해 훌륭하게 갖춰지기 시작한 20세기 하반기 들어서만 해도 무수한 재해들이 숱한 목숨들을 앗아갔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나가사키 호우로 잘 알려진 지난 1982년의 폭우. 7월23일부터 3일 동안 큐슈(九州)의 나가사키(長岐) 하늘에 구멍이 뚫리며 쏟아져 내린 비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만 299명에 이를 정도의 국가적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11일간에 걸쳐 무려 600mm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이미 호우경보가 내려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23일 오후 7시부터 3시간에 걸쳐 7월 한달 간의 평균 강수량을 웃도는 315mm의 비가 다시 쏟아져 내리면서 곳곳에서 산이 무너져 대규모 토사가 발생했다. 이후, 격랑 속으로 흘러 들어간 자갈과 모래는, 포탄 같은 흉기로 돌변한다는 의미에서 일본인들이 철포수(鐵砲水)라 부르는 끔찍한 흙탕물로 변하며 주변의 모든 마을들을 형체도 없이 쓸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지난 1967년 8월 26일 니가타(新潟),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 등 3개 현에서 하루 동안 500mm의 호우가 쏟아져 사망자 113명, 행방불명 33명, 부상자 1980명이라는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와 함께, 1972년 7월 4일에는 밤새 시코쿠(四國)의 고치(高知)현에 집중호우가 내리기 시작,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며 다음날 아침까지 시간당 최소한 60mm 이상의 비가 24시간 동안 내렸다. 결국,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하며 폭 100미터, 길이 150미터 정도의 거대한 흙더미가 마을을 덮쳐 61명이 사망하고 20여 채의 가옥들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고치현을 강타한 장마 전선이 구마모토(熊本)현과 미야자키(宮岐)현으로 이동하며 자갈 흙탕물인 철포수(鐵砲水)를 마구 쏟아내 다시 100명이 추가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호우(豪雨) 재난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안타까운 사실은 완벽을 기하려는 일본인들이 호우 대비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기상청의 강우량 관측 시스템으로 알려진 ‘아메다스’(AMeDAS)는 전국 1313개 지점에 지역 강우량 관측소를 두고, 그 가운데 약 840개 지점에서 보내온 기온과 풍향과 풍속 일조 등을 합한 정보를 토대로 자국의 하늘을 속속들이 파악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관측소가 전국적으로 17km 거리마다 한 개 꼴로 촘촘히 배치가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976년 10월 18일의 도쿠시마(德島)현 무기쵸(牟岐町) 호우 같은 사례는 여전히 잡아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당시 3시간 동안 400mm 이상이 쏟아진 기습폭우로 350여 채의 집들이 물에 잠기고 산이 붕괴됐으며 제방과 도로가 파괴돼 1000여 명의 이재민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본의 호우(豪雨) 스트레스를 적절히 반영하는 격언이 바로 ‘인간 제물을 내지 않으면 장마가 그치지 않는다’라는 무시무시한 옛말이다. 이와 함께 ‘(힘들고 괴로운 일은) 물에 흘려 보내라’라는 잠언(箴言) 또한 물 많고 재난 많은 일본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속담이고. 하늘이 노했기에 인간의 목숨을 바쳐야만 천지신명의 노여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한 조상들이 가슴 아픈 기억은 마을 앞 강물에 빨리 흘려 보내고 살아있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대대손손 물려 준 생존 계명(誡命)인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부족하다고 노박이로 비판 받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도덕성 미비 때문이라기보다, 저주받은 땅에서의 정신적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설명
일본의 역사박물관이나 국립 박물관에 가면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 유물(遺物) 가운데 하나가 다리(橋)이다. 박물관 안에 축소 또는 실제 크기의 다리를 설치해 놓고 에도 시대의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풍부한 삼림 자원을 바탕으로 물 많은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수도 없이 많은 나무다리들을 지었다. 사진은 도쿄 에도 박물관에 설치된 실물 크기의 나무 다리로 박물관을 들어오면 제일 먼저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유물이다. (저자 촬영)
/심훈 (언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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