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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책 한권] 희미한 별의 관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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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13  19: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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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자란 온순한 젊은이들은 키케로나 로크 혹은 베이컨이 제공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들은 키케로, 로크, 베이컨이 이 책들을 썼을 때, 그들 역시 도서관에 파묻힌 젊은 청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이리하여 사색하는 인간 대신 책벌레가 생겨난다...이리하여...각종 서적 수집광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만 쓸모가 있는 것”이고 “책에 이끌려 자기 자신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의 체계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위성이 돼 버린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 19세기 미국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의 ‘미국의 학자’라는 에세이에서 인용한 것이다. ‘내 인생의 책’이라는 글을 시작하며 에머슨의 책에 대한 단상을 빌려오는 것은 책을 통해 영감을 얻기보다 ‘수집광’ 흉내내기에만 그쳤던 20, 30대의 짧은 기억 때문이다. 

책 읽기 자체에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니면서 책 모으는 것은 좋아했는데 그것도 주로 돈이 들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그래서 신문사에 다닐 때도 사내 자료실에서 정리를 위해 처분할 책들을 복도에 쌓아두면 일일이 뒤져 박스에 채워 오곤 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심리학과 한 교수님이 복도에 두 박스 넘게 내놓은 책들을 ‘배부른’ 마음으로 자전거에 실어 오기도 했고 버클리․알바니 등 인근 시립도서관에서 내놓는 헌책들을 50센트, 1달러에 긁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책에 담긴 생각에 대해서라기보다 공짜, 혹은 ‘싼 지식의 유혹’(?)에서 비롯된 책 수집이었기에, 그렇게 모아진 책들은 하릴없이 그냥 수북이 쌓여왔었다.
그러던 중에 학보사로부터 책 이야기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그 먼지 쌓인 책들의 제목에 하나씩 시선을 던져보다 뽑아든 것이 에머슨의 에세이집 ‘자연’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세계의 산문’ 시리즈 세 번째로 펴낸 에머슨의 ‘자연’은 사실 ‘자연’ ‘미국의 학자’ ‘초령(Over-Soul)’ ‘경험’이라는 네 가지 에세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에머슨이라는 인물이 다각적으로 평가되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의 사상적 지향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에머슨은 미국 초기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가 (미국적 사고의 전형이랄 수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의 선구자라고 지칭한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에머슨은 플라톤주의, 독일의 관념론,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을 수렴한 결과로 평가되는 미국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사상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잘 안 어울릴 것 같은 실용주의와 관념론이 융합된 에머슨의 사고는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 ‘자연’이라는 에세이집은 그 답을 제시하며 미국식 철학의 한 단편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다. 이 책은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며 진리를 논하는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에게, 진보와 보수 혹은 미국식으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무리지어 필요 이상의 갈등 구도를 빚으며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사회에,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지털시대로 성격 지어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에게, 다면적인 충고 혹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물론, 이 에세이들은 노예의 소유권 문제를 놓고 남과 북이 대립되기 시작하고 미국 민주주의의 동반자였던 신문이라는 것도 이제 막 대폭 값을 내린 페니 프레스(penny press)가 길거리 신문팔이 소년들에 의해 팔리기 시작하던 시대에, 말하자면 시공간적으로 아주 먼 곳에서 쓰여진 것이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양상들을 그 시대에 미리 예측한 탓에 지금 읽어도 ‘살이 되는’ 이야기를 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실용주의, 초월주의의 융합에서 예견되는 에머슨 사상의 다면성이 시공간의 먼 차이를 넘어 의미 구성 주체인 독자들에게 현 시대에 어울리는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30년대 미국 남북 전쟁 전에 쓰인 글이 21세기 한국 독자에게 던지는 의미는 이 같은 다양성 탓에 그 의미의 발견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자연’에서 두드러진 그의 초월주의는 간략한 소개가 필요할 듯하다. 초월주의는 한 마디로 세상은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세계의 이런 저런 현상들이 다 그 절대적인 무엇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자연이란 것도 결국 하나의 절대적인 무엇이 ‘중심적 통일성’을 갖추고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에머슨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건축을 “동결된 음악(frozen music)”이라고 한 괴테나 “건축가에게 해부학은 필수”라고 한 미켈란젤로를 인용하며 ”한 예술의 규칙 혹은 한 조직의 원리는 자연 속에서 두루 통용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너무나 전형적인 관념론의 미국식 표현일 뿐이라고 덮어버릴 수도 있지만 가치와 의무 등 하나의 의미에 ‘합의된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시대에 작은 위안이 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대학에서 자아를 정립하고, 답을 찾고, 자신을 실현할 길을 모색하고, 연구와 가르침을 진행 중인 캠퍼스 가족 모두에게 에머슨의 ‘미국의 학자’라는 산문은 작은 힘이 될 수 있다.

“자신만의 사적인 관측소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인간 정신이라는 희미하고 몽롱한 별의 목록을 관측하는 학자”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학자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사적인 관측소’를 만들어 행동하고 그 결과를 관찰하고 다시 행동을 조정하는 삶의 연구 메커니즘을 이어가는 모든 이들이 포함될 것이다. 에머슨이라는 19세기 미국 초월주의자는 이런 삶을 원했다.

/주영기(언론정보ㆍ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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