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약간은 짓눌린 목소리로 담배를 주문했다.

- 비닐에 담아주세요.

휴대전화를 한 손으로 빙글거리며 걷고 있었다. 아파트 라인마다 늙은 경비들이 꾸벅이며 졸고 있거나 멀뚱하게 길 위를 보고 있거나 신문을 보고 있거나…….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동안 내내 휴대전화를 돌리며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부저가 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음식쓰레기가 든 봉투를 든 여자와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음식쓰레기가 든 봉투에서 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에 비해 넓은 엉덩이가 봉투의 무게를 못 이겨 좌우로 심하게 움직였다.

아내에게 전화를 할까? 한편으로는 아내를 위한 저지방 우유를 사지 못한 것이 상당한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냉장고 안에 저지방 우유는 있었던 것 같은데 날짜가 수상쩍기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집 현관을 향해 그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내와 내가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된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다만 그 언젠가, 정확하게 꼬집어 밝힐 수 없는 그 언젠가부터 아내와 나는 부담스러운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되었던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것조차 기억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잦은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큰 잘못으로 시비를 걸어본 적도 없는데 도대체 아내와 나는 언제부터? 휴대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대답 없이 끊기는 전화에 괜한 관심을 쏟았다. 또 한번 전화가 울렸다. 반갑지 않은 친구의 전화였다. 냉장고에 우유를 넣었고 아내의 저지방 우유의 날짜를 확인했다. 유효기간은 지나 있었다. 그러나 맛은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듯 했다. 다시 냉장고에 우유를 넣어 두었다. 8시가 조금 넘었다.

이른 아침, 아내는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약간 부은 아내의 얼굴은 전날 피로가 내려앉아서 인지 요 며칠 전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코코볼 위에 따라 부었다. 그 사이 아내가 약간 몸을 비틀었다. 아내의 뒤통수에 햇볕이 반사되어 아내의 잔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일어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숟가락으로 코코볼을 떠먹으며 라디오의 전원을 눌렀다. 아침부터 '비치 보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비치 보이스의 리듬을 타며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내가 내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리듬을 타는 통에 바닥으로 우유에 젖은 코코볼이 떨어졌다. 걸레는 개수대 아래 바짝 마른 채 놓여 있었다.

굽이 뾰족한 샌들에 무게를 실은 아내의 몸은 버스에 오르는 계단에서 두 번쯤 기우뚱거렸다. 아직은 살집이 있는 아내를 버텨내기에 샌들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아내의 두 다리가 위태롭게 휘청거렸고 내 손은 무심결에 아내의 허리에 올라갔다. 아내의 물렁한 허리 살이 손끝에 머물렀다. 아내는 양다리에 힘을 주며 간신히 좌석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아내의 샌들이 맞닿을 때마다 똑똑-, 소리가 났다. 나는 멍해진 표정으로 버스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잎사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지가 늘어진 마로니에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먼지 없는 송파>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바람에 팽팽해진 것이 보였다. 버스가 부웅, 연기를 뿜어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는 아내가 앉아 있었다. 아내의 목덜미에 둥근 땀들이 땀구멍 개수만큼 솟아 있었다. 아내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아내가 내 손을 세게 밀쳤고 나는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회사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40분 정도 더 가야만 했다. 아내가 앞좌석에서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곽의 자리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남자 직원이 들어올 지, 여자 직원이 들어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곽이 나가기 전에 발령 받은 새 부장과 차장만은 누가 들어올 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것에 관심은 없었다. 곽이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모든 사태는 수습이 된 것이었다. 곽의 불행으로 인해 진급한 새 부장과 차장은 표현은 안 했지만 곽의 사퇴를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색한 그들의 아침인사가 흥겨웠다.

대충 서류들을 정리해놓고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가 자동판매기가 있는 통유리창 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여직원 한 명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여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달콤한 향수냄새가 그녀가 걸어온 복도 위에 조금씩 배어 있었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코를 벌름거리며 연거푸 들이마신 공기에 숨이 조금 차 올랐다. 커피 자동판매기에서 커피가 만들어지는 사이, 난 잠시 내가 만졌던 곽의 엉덩이를 떠올렸다. 나는 그녀를 취하지 못한 사실이 아쉬웠다. 곽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두게된 전 부장과 차장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그들보다 그녀를 취하기에 더 용이한 몸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엉덩이만 만져본 내 손이 부끄러웠다. <다음 호에 계속>
 / 이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