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언어, 즉 모국어가 영어 때문에 소멸한다는 것은 한낱 억측에 불과할까? 아니면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처럼 눈부신 성장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억측일까? 현재 우리나라는 영어실력이 출세와 소득까지 결정하게 되면서 영어격차가 빈부격차로 확대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한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억측으로만 볼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영어 공용화에 대한 목소리는 실리와 경제 원리에 따라 영어 공용화를 받아들이자는 입장과 세계화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한국 문화와 언어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반대의 입장으로 나뉜다.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책은 한국의 영어 공용화 선언 이후 벌어질 일들을 가상으로 꾸며 본 것으로 언어학을 전공하는 다섯 명의 교수진이 공동집필한 것이다. 필자들은 영어 공용화 실시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접어두고 한국어가 사라져가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그 폐해의 심각성을 대중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영어 공용화 발표를 기점으로 30년 후, 60년 후, 100년 후, 500년 후의 5단계를 통해 한국의 실상을 드러낸다. 1장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영어 공용화를 시작한 2023년의 한국, 2장은 그로부터 30년 뒤 영어 능력이 천양지차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시대, 3장은 60년 뒤의 이야기로 한국은 명실상부한 영어의 파라다이스가 되어 영어가 확고한 국어로 자리 잡게 되는 시대, 4장은 영어 공용화가 시행되고 1세기가 지난 뒤의 이야기로 영어가 한국인의 모국어가 된 시대, 5장은 500여 년이 흐른 뒤의 한국으로 한국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시대로 요약된다.

본문은 대체로 암울한 미래를 담고 있는데, 시간순으로 영어의 몸집이 커지듯 그에 따른 사회 문제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영어만을 쫓다 보니 일종의 문화지체현상이라 할 수 있는 ‘영어지체자들’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상대적으로 능숙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갈등, 한국어가 편한 노인 세대와 영어가 편한 손자 세대의 대화 단절 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또한, 한국에서는 영어가 국어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과의 차별은 불가피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벌어지자 언어 또한 중국어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우리는 다시 중국어를 쫓는다. 한국어를 사라지게 만든 필자들의 가상은 허무맹랑하지만, 이 같은 사회 문제는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성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의 결말이 우리가 상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저력은 치밀한 구성에 있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을 텍스트화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 현실성까지 불어넣어 영어 공용화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들의 전략은 실제 신문 보도, 사설, 연구 논문, 역사적 사실 등을 모두 끌어와 현실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 예로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선진국이 되고, 세계의 대세에 동참한다는 대의명분은 120여 년 전인 1910년의 한일합방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중략… 세계의 대세에 순응한다는 대목이 불현듯 K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9쪽)” 이는 영어 공용화가 시행된 후 모국어를 상실해 가는 과정을 일제시대 때 모국어가 쇠퇴하는 과정과 대응시켜 설득력을 높였다.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어 필자들의 우려가 단순한 우려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들의 주장 또한 단순한 억측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여 미래의 일을 가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사례들이 예측 가능한 상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어 때문에 겪는 세대 간 격차, 지역 간 격차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이며, 영어와 함께 불게 되는 한국의 미국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애초 “필자들은 영어 공용화의 본질과 그것이 가져올 폐해를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충격적인 요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중략… 그 폐해의 심각성을 대중들이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6쪽)”라는 집필 의도에서 다소 벗어난 듯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보조 자료에만 의존한 것처럼 보여 정작 현직 언어학자 교수진이 생각하는 다른 시각의 문제점이 담겨있지 않은 점 또한 아쉬움으로 작용한다. 큰 비중의 보조 자료는 단순히 가상의 문제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보조 자료를 통해 문제점을 도출해 낸 것이기 때문에 ‘인과관계에 의한 문제점’으로 국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이긴 하되 덜 적극적이고 덜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상이어서 막연한 우려로만 치부될 수 있던 부분을 구체화시킨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영어 공용화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기존의 책과 다른 접근 방식 때문일 것이다.

기존의 책들은 문제점을 단순히 지적하거나 이론적 관점, 정책적 관점에 치우치는 등 학술적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언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문제점을 지적하되 가상의 이야기를 넣어 비교적 쉽게 풀어나가고 있어 기존의 책이 갖는 한계를 벗어난 데 의의가 있다.

한국어가 소멸하고 영어만으로 경제 성장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억측인지, 예측인지 그 사이가 애매한 것은 그래도 아직은 우리말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신은 한국어에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있는가? 당신의 한국어 관심 여부에 따라 이 책은 억측과 예측 사이를 오고 갈 것이다.

/ 허은영(국어국문.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