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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논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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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31  16: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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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거대한 사회를 지탱해 온 유교 이념은 무너지지 않는 완고한 성벽과도 같다. 고로 필자는 만리장성을 통과한 ‘카퍼필드’와 같이 비판적 시각으로써 완고한 성벽을 뚫어보고자 한다. 이 글이 어린 날에 멋모르는 한낱 호기로 남을지라도 훗날에는 유익한 실패의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하나의 생각이 변화를 동반한 시대를 초월하면서까지 불변하게 적용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결코 공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천운이 아닌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천운과 재능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경계의 함의는 자신이 예견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차이다. 공자도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 그간 세월로 얻은 경험이 작용할 것이다. 그의 경험과 사고의 깊이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깊지만 문제는 인간으로서 지닌 운명적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전능한 존재로서 모든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또한 한 개인의 앞날을 쉬이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사회 전체가 변한 미래는 더욱 그러하다. 공자의 가르침은 배워야 하는 좋은 말씀이되 결코 시대를 초월하면서 만사에 적용될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는 논어 본문의 구절을 인용해 이를 통해 오늘날 현대 사회에 잘못 뻗어 나간 뿌리는 무엇인지 또한 변질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개인적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야 되는 것이다. 대부의 신분으로 어찌 제 집 마당에서 팔일무를 즐긴단 말인가?” 고작 ‘대부’의 신분을 지닌 자가 본인의 집 마당에서 팔일무의 춤사위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공자가 한 말이다. 설사 제 집 마당일지라도 팔일무를 즐기기엔 그의 신분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일로 인해 공자는 평소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분노를 표하고 심히 일갈하는 모습을 보인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와 같이 그 역할에 맞는 사람들은 따로 존재하며 그 역할은 덕망의 높이로써 정해진다고 여겨왔다. 그도 그럴 것이, 문득, 약 1년 전, ‘문화 산책’이란 TV프로그램에 나왔던 한 인문학자의 말이 기억난다. 역사 속 임금들의 저서를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폭정의 이미지와는 달리 책을 보는 내내 당시 임금들의 넓은 아량과 따뜻한 인정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자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도 덕망이란 흰 바탕이 넓을수록 그 수준에 맞는 높은 신분을 얻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하지만 덕망으로써 신분이 구별되는지, 먼저 구별된 신분이 덕망을 만드는 것인지, 그 순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인용구절의 ‘흰 바탕’은 덕망 자체일 수도, 혹은 신분으로서 보이는 덕망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모호함으로 인해 변질의 틈이 생겼으리라 본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변화를 거듭한 세월만큼 당시와 현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는 통화량이 곧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고 생존 지속성을 결정한다. 대중매체와 매스컴의 발달은 개인 중심적 가치관을 무한정으로 상승하게 했다. 그것은 곧 부추기는 소유욕으로써 ‘흰 바탕’을 차근히 형성하는 느린 길보다는 TV속 그들처럼 되기 위해 소비의 만족감을 택하게 한다. 어쩌면 여유로운 성찰의 삶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투쟁하는 삶을 나 스스로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목표는 같지만 덕망의 질과 방법의 차이가 결국 사회 전반적으로 가치관의 변질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보여지는 경제적 신분으로써 개인의 행동을 규제해서는 안될 일이다.

두 번째로 공자는 ‘수기치인’을 역설했다. 자신의 분수에 맞는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사회와 국가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하나 전제돼야 한다. 그건 바로 ‘신뢰’다. 역할의 충실과 국가의 안정, 그 사이에는 신뢰라는 단단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며 다리는 부실공사로 인해 균열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일각에선 이미 “다리의 실체조차 없다”며 무사상이란 오명까지 씌우고 있다. 비록 사회적 인프라가 발전을 거듭하고 개인의 가치관이 자유로워졌더라도 기득권층의 시대를 퇴보하는 모습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 신뢰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신뢰의 가치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결코 안정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유가사상은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 깊은 유교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기존의 동양적 가치관 속에서 무르익지 않은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다. 설익은 열매를 집어먹은 대가로 소화불량의 탈을 겪고 있는 셈이다. 기득권층은 서구의 새로운 지배이념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받아들였지만 이와는 반대로 대중에겐 기존 유교사상의 잣대로 일관하고 있다. 신뢰회복을 위한 대화의 창구조차 그들 스스로 막아서고 있다. 잘못 뻗어 나간 나무의 뿌리는 그 뿌리가 깊을수록 도리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유교사상이 온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관에는 합당할 수 있으나 개별적 사안들조차 사상의 힘으로 누르고자 한다면 결코 탈을 면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에게는 존중받고자 하는 평등한 인권이 있으며 개인의 가치관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편성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나의 견해가 모두 옳진 않다. 그렇다고 이념의 잣대도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양자택일은 인간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무모한 일일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위도 또 한 번 양립된 사상의 당위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교사상이라는 ‘원리의 한계’를 벗어날 가능성은 이해와 건전한 대립을 통한 정반합으로 비로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 양승우(경영ㆍ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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