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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견문록]‘한자 이야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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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05  14:3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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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미 국무부가 전 세계에 파견 근무 중인 외국어 보직자 2832명을 대상으로 69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분류한 적이 있다. 난이도에 따라 ‘기타 언어’를 포함해 가장 쉬운 ‘세계어’에서부터 ‘고난도 언어’를 거쳐 ‘초고난도 언어’에 이르기까지 4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그런 미 국무부의 분류 기준에서 ‘초고난도 언어’로 꼽힌 4가지 언어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어’와 ‘중국어,’ ‘아랍어’와 ‘일본어’였다. 그러고 보니, 모두 동양어인데다 세 개는 극동어이니 결국,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권은 한, 중, 일 삼국이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이 음의 높낮이와 끝도 없는 한자로, 한국은 기하학적 모양의 한글과 띄어쓰기로 외국인들을 골탕 먹인다면, 일본은 단연코 한자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으로 세계인들을 좌절시키고 있다. 그럼, 한ㆍ일 양국 간은 서로의 언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어려워할까? 한국인들에게 있어 일본어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사실이듯, 일본인들에게도 한글은 무척이나 어려운 초고난도 언어다.
  
이에 관한 필자의 에피소드 한 가지. 도쿄(東京) 체류 당시 일본어 수업을 듣던 어느 날, 한자 읽기로 고전을 하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해 선생님께 여쭤 보았다.

  “저는 일본어 배우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혹시 한글을 배우신 적이 있나요?”
  “있습니다만, 어려워서 포기했어요.”
  ‘어라?’ 한글이 어렵다는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란 필자.
  “아니, 한글이 어려울 게 있나요?”
  “물론입니다. 한자가 하나도 없으니 읽는 것은 금방이지만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한자 없는 단어들을 그대로 다 외워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요.” 

   


순간,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진 가운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과서와 신문, 교통 표지판과 지하철 등 주변에서 시나브로 사라져버린 한자들이 떠올랐다. 사실이 그랬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한자 없는 한글은 의미를 상실한 표음(表音) 문자에 불과했다. 마치 영어의 ABC처럼 완전히 다른 언어권의 글자였기에 이웃에 위치해 있지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문자가 ‘한글’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일본어를 몰라 고생했지만, 길거리와 지하철, 학교와 관공서에 표기된 한자어를 통해 의미를 이해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며 일 처리를 진행했던 도쿄 정착 초기의 경험이 생각났다.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라는 일본인 학자가 있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일본에선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 받는 대학자다. 그런 그가 학명(學名)을 떨친 계기가 바로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의 편찬이었다. 1928년부터 1960년까지 장장 33년간에 걸쳐 49,000여 개의 한자어를 총 정리한 모로하시 데쓰지의 「대한화사전」(13권)은 출간 당시, 세계 최초이자 최고 수준의 한자 사전이었다.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도 감시 시도하지 못했던 희대의 업적. 그런 모로하시 데쓰지의 「대한화사전」이 중화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화권 한학자들은 한자어 사전 제작에 박차를 가하며 25년이 지난 뒤 대만이 먼저 5만 단어로 구성된 7권짜리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을 내놓기에 이른다. 중국 역시, 이에 질세라 대만이 사전을 편찬한 지 9년 뒤, 5만6천자로 이뤄진 13권짜리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을 발간한다. 현재 한국은 지난 2008년 한자 사전 발간을 둘러싼 대경주의 마지막을 장식한 상태. 무려 38년간에 걸쳐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가 6만여 개의 한자와 50만여 개의 한자 어휘를 수록한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을 발간한 것이다. 더불어, 가장 풍부하고 가장 정교한 한자 사전을 세계 최초로 디지털화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설하고, 모로하쓰 데쓰지의 한자사전 편찬 위업은 일본이 얼마나 뿌리깊은 한자 국가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 문자의 두 축을 이루는 히라가나(ひらがな)와 카타카나(カタカナ) 모두 한자어에서 비롯된 글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히라가나의 경우, 편안할 ‘안’(安)자에서 ‘あ’(아)가 탄생했으며, 써 ‘이’(以)자에서 ‘い’(이)가 나왔고, 집 ‘우’(宇)자에서 ‘う’(우)가 만들어진 식으로 말이다. 그런 일본이기에 한자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아소(麻生) 전 총리를 일본인들은 무척이나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한국의 사전적 위상과 달리, 실생활에 있어서의 한자 사용은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꼴찌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모국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의 경우는 2136개 상용한자를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집어넣음으로써 기본적인 한자를 전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까닭에서다. 일본은 1946개였던 상용한자를 2010년에 191개 더 늘린 상태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한자 교육이 교과 과정에서 아예 사라졌다가 선택과목으로 재등장하는 등 영욕(榮辱)과 부침(浮沈) 속에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교장의 재량으로 채택되고 있는 한자 교육은 현재, 중·고등학교에선 선택 과목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돌이켜 보면, 동아시아 문명의 정수(精髓)인 한자는 지난 5천년 동안 한, 중, 일 3국의 공용어였다. 하지만 관용적인 의미에서의 한, 중, 일 삼국이지 실제로는 몽고와 거란에서부터 여진과 돌궐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는 국제어가 한자였다. 당시의 중화권이 세계의 전부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한자어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어’였던 셈이다. 인종과 국가,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필담(筆談)만을 통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시대 상황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례로, 일본어 한 마디 못하는 조선의 통신사들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일본 유학자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아무런 지장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일본인과의 대화가 불가능한 지금으로 볼 때,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은 1천년 이상 지속됐다. 그러고 보면, 한족을 포함해 어떤 이민족이 왕조로 들어서도 한국의 사신들과 유학자, 선비와 양반들은 중국의 앞선 문명과 문물을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해서, 한민족 최고의 발명품인 한글 역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세종대왕이 성삼문, 신숙주 등을 13차례나 보내면서 탄생시킨 결과물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자 문화권이 동아시아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 당시 조선에겐 월남(越南)으로 알려진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역시, 중국 북경에서 우리 선비들을 만나면 한자로 대화를 나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가 국가 철학이었던 베트남에서 월남 관리들도 반드시 한학(漢學)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과거제도, 유사한 유학 기관, 똑같은 공자 문묘(文廟)는 사실상, 베트남마저 한, 중, 일의 한자 문화권으로 끌어 들인 원동력이었다. 그랬던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한자와 유교를 배척하기 시작하면서 한, 중, 일의 한자 문화권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사정이 이럴진대, 작금(昨今)의 ‘한자 불용론’(不用論)과 ‘한문 퇴출론’(退出論)은 장구한 동아시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매우 편협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무수한 난관들이 놓여 있긴 하지만 공용 한자어를 제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한, 중, 일 삼국의 노력도 그 같은 예단(豫斷)을 경계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 벨기에와 덴마크 같은 소국들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국어 교육에 남달리 천착하는 것처럼 한자 역시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간의 문화적, 정서적 간극을 좁힐 최고의 외교 무기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정부에 앞서 기업과 사교육을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는 한자 급수 시험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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