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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견문록]“열도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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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14  19: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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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수차례에 걸쳐 일본인들이 무서워하는 네 가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지진, 벼락, 화재와 함께 간단히 소개됐던 네 번째 요소는 바로 ‘아버지’ 국가 전체가 수백 년 동안 병영 같은 체제를 유지한 열도에서 사무라이나 진배없는 아버지는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외경스런’ 존재였다. 아파도 내색하지 않으며, 기뻐도 웃지 않고 슬플지언정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얼굴 뒤에 가린 채 언제나 아이들에게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왔다.
  
실제로, 일본의 TV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들은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과묵함으로 무장하곤 한다. 마치, ‘세이자’를 한 채 전형적인 사무라이 표정을 짓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라고나 할까? ‘세이자’란 일본식 정좌(正座)를 일컫는 말로, ‘세이자’를 한 사무라이는 칼을 찬 상태에서 무릎을 가지런히 꺾고 등뼈를 꼿꼿이 세운 채 위엄 어린 표정으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게 보통이다. 반대로, 주인공의 대립선(對立線)으로 등장하는 조연자는 흔히, 우스꽝스런 얼굴 표정과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선보임으로써 열도인들에게 감정 처리의 우열을 판단케 하는 가늠자 역할을 제시해 주고.

장면 I
    오토: “난 네가 죽어갈 때도 역사(驛舍)의 눈을 치우고 있었단다. 바로 이 책상에
           서 일지(日誌)도 썼지. ‘금일 이상무’라고.”
    유키코: “그건 아빠가 철도원이니까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토: (딸을 어루만지며 울다가) “미안하구나.”
    유키코: (역시 아빠 품에서 울다가) “고마워요, 아빠. 유키코는 행복해요.”

주인공 ‘오토’(타카쿠라 켄 분)는 젊은 시절 철도공사에 입사해 평생을 철도원으로 보낸 공무원이다. 중년이 돼서 홋카이도(北海島)의 시골 마을 종착역인 ‘호로마이’에 부임해 정년 퇴임 때까지 역원 한 명 없는 역사(驛舍)를 지키는 일과를 반복한다. 그러는 가운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된 호로마이 역의 운영 문제를 놓고 철도공사 측은 역 폐지를 결정한다. 이제 그에게는 은퇴 후, 할 일도 갈 곳도 없다.
  
자신의 일에 너무 엄격한 나머지 언제나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 한 그는 뒤늦게 얻은 첫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순간에도 홀로 종착역을 지켰던 일본 남자다. 훗날, 아내가 임종하는 순간마저도 역에 남아 기차를 챙긴 그에게 역사 안의 관사(官舍)는 집이나 다름없는 보금자리였다.
  
갑작스레 환상적인 이야기가 가미되는 것은 역사(驛舍) 폐지가 결정된 이후부터.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여자아이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을 거쳐 고등학생 소녀까지 시간을 두고 찾아오는 밤을 경험하며 그는 그녀들이 모두 17년 전에 죽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어갔던 그녀 앞에 오토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진한 사과를 한다. 다음날, 철로 위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된 오토의 시신. 다른 직장을 알아놓았다는 평생지기 철도원 친구의 권유도 마다한 채, 결국 마지막까지 철도원으로 살다 속죄하는 심정으로 가족에게 돌아가는 운명을 택한 것이다.
  
지난 2000년 개봉돼 열도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철도원’은 일본 영화의 대표적인 수작(秀作)이다. 지난 1997년 소설로 출간돼 무려 140만 명의 독자들을 감동시켰던 ‘철도원’은 또, 작가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에게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나오키(直木)상 수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필자가 그런 ‘철도원’을 난데없이 소개한 이유는 바로 일본의 남성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영화가 다름 아닌 ‘철도원’이라는 생각에서다. 사무라이 일본과 사무라이 일본인을 모른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라인은 해서, 한국의 많은 영화 시청자들로 하여금 “‘미안하다’며 눈물짓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고맙다’며 ‘행복하다’고 답하는 딸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족(蛇足)을 촌평으로 달게 한다.

장면 II
    준상: (보이지 않는 눈을 소리가 난 쪽으로 향하며) “누구시죠?”
    유진: “······.”
    준상: “누구시죠?”
    유진: “······.”
    준상: (조심스레) “유진이니?”
    유진: (따라 하듯 같은 톤으로) “준상이니?”
    준상: (나지막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유진아.”

(그러자 기다렸다는 준상의 품으로 뛰어드는 유진) 

고등학교 전학생 준상(배용준 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없는 유진(최지우 분)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주변의 시기와 방해 속에 준상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할 경우 자칫 기억력을 잃을 수 있다는 의사 말에 사고 후유증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유진 곁을 떠난다. 훗날 유진 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한 번 더 교통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게 되고 마는 준상.
  
밀고 당기는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 20회에 걸쳐 진행된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지막 회. 남이섬에서 유진이 꿈꾸던 집을 짓고 외롭게 살아가는 준상 앞에 모든 것을 버린 유진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준상은 상대방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그런 준상이 인기척을 느낀 후 직감적으로 유진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유진도 화답하며 준상의 품으로 달려든다. 이윽고, 석양 속의 키스를 통해 둘은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마무리한다.
  
지난 2002년 1월에 방영돼 3월 종영한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는 일본에 한류(韓流) 열풍을 불러일으킨 기폭제였다. 부드러운 미소와 애정 어린 눈웃음으로 연인을 바라보던 배용준은 한평생 무서운 아버지와 무뚝뚝한 남편, 숨막힐 듯한 집안 분위기에서 살아온 일본 주부들에게 메가톤급 충격으로 다가왔다. 배용준에 대한 최지우의 사랑 역시 지고했지만 성공과 출세, 안녕과 건강은 제쳐둔 채, 오직 연인만을 위해 살아가던 배용준의 모습은 사랑받는 법조차 잊고 있었던 열도의 여성들에게 다른 세상이 이웃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후, 주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한류 저기압은 급기야 초대형 태풍으로 변하며 열도를 강타하더니 마침내 한국행 엑소더스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뤽 베송 감독이 지난 1997년 내놓은 영화 ‘제5 원소’는 마치 일본을 위해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간단히 들여다본 영화 내용은 이렇다. 멸망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선진 문명의 외계인 릴루(밀라 요보비치 분)가 어렵사리 지구에 도착한다. 하지만, 지구 파멸을 꾀하는 악당들을 힘겹게 물리친 끝에 접하게 된 지구의 역사는 전쟁과 학살의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결국 인류가 저지른 온갖 재앙과 파멸의 역사를 들여다본 후, 지구의 구원을 망설이게 되는 릴루.
  
영화의 절정에서 남자 주인공인 코벤 달라스(부르스 윌리스 분)는 물, 불, 흙, 바람의 네 가지 원소를 준비한 채, “그래도 사랑은 지킬 가치가 있어, 당신을 사랑해!”라고 외치며 릴루에게 간절한 사랑의 키스를 전달한다. 그러자 이성애를 체험한 릴루의 몸에서 생명의 마지막 원소인 사랑의 빛이 솟아오르며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던 괴행성을 멈춰 세운다. 마찬가지로, 사무라이의 무정함에 수원(水源)조차 메말라 버린 박토(薄土)엔 사랑의 단비만이 생명의 싹을 잉태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水) 많고, 불(火) 많으며 땅(土)이 흔들리고 바람(風)마저 잘 날 없는 일본을 구원하는 것은 단연코 ‘사랑’(愛)이다.






사진 설명 1
일본에서 ‘후유노 소나타’(겨울 소나타)로 소개된 ‘겨울 연가’는 지금까지도 일본 내에서는 최고의 한류작으로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사진은 필자가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의 어느 전자상가에서 발견한 ‘겨울 연가’ 닌텐도 게임. (저자 촬영)


사진 설명 2
이제 한국 드라마는 한국식 사랑에 목마른 일본 주부들이 반드시 시청해야 하는 필수품이 됐다. 사진은 일본의 유명 비디오 대여점인 ‘츠타야’가 점내(店內)에 마련하고 있는 한류(韓流) 코너. 필자가 거주하던 동네엔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만 별도로 비치한 진열 코너가 매장 내에는 두 군데나 더 있었다. (저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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