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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켄트와 카레아스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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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04  21: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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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타쉬켄트

코칸드에서 타쉬켄트로 가려면 캄치크 고개(해발 2,267미터)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타시켄트까지 다시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경치는 키르기스만 못하다. 중간 중간에 있는 도시들도 공업지대가 많아서 그런지 어수선하고 먼지와 스모그가 자욱해서 동유럽의 피폐한 도시들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타쉬켄트는 꽤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가로수와 공원이 많고 도시 정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시민들이 교통신호도 잘 지키고. 정류장에 서있는 아가씨들도 미인들이 많다. 우즈백에선 ‘김태희가 감자를 캔다’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많은 미인들이 감자가 아니라 목화를 따고 있었다. 

티무르박물관을 방문했다. 티무르를 우즈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 때문에 그런지 정말 화려하고 알차게 만들어 놓았다. 티무르제국(1370-1507)의 수도가 사마르칸트였고, 그 도시는 티무르가 건설했기 때문에 거기에 이런 기념관을 건설해야 더 역사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의 수도는 타쉬켄트이기 때문에 이 박물관을 여기에 만든 것 같다. 티무르광장에는 티무르 동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징기스칸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아랍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저런 대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사마르칸트 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역사박물관에서는 불교 관련 유물을 다수 확인했다. 아프간과의 국경도시에 있는 테르미즈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여기에도 있었다. 여기에 있는 유물이 진품이고, 테르미즈에 있는 것이 복제품이라고 한다. 유물도 티무르처럼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로 치면  중요한 것은 모두 서울에 있는 중앙박물관으로 올라가고 지방박물관에는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원래 주인에게 모든 걸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지방자치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 이맘 광장에는 여러 건물들이 모여 있어서 이름조차 헷갈린다. 모이에 무바레크 라이브러리 박물관은 광장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오스만제국(1299-1923) 시대 중기에 제작한 가장 큰 코란이 있는 곳이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님 모스크에 가면 이 코란을 얹어 놓았던 기단이 지금도 서있다. 박물관 안에는 정말 멋지고 우아한 코란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금박으로 쓴 코란도 있다. 무슬림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 비싼 금가루로 코란을 썼을까. 

초르수바자르의
카레아스키 아줌마

구 도시에 위치한 초르수바자르는 소문대로 엄청나게 큰 시장이었다. 쿨케다쉬 메드레사와 주마모스크 뒤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정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파는 물건이 많았다. 시장은 상인들과 손님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옛날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 옛날 대상들은 여기서 어떤 물건들을 사고팔았는지 궁금했다. 시장 길거리에서 200달러를 환전 했는데, 달러 당 2,700솜이나 받았다. 호텔보다 500솜이나 더 받은 것이다. 환율로 치면 약 23%나 더 받은 셈이다. 10만 원 당 2만3천 원을 더 받은 것이다. 큰돈이다.

여기서 러시아식 김치를 팔고 있는 카레스키아 아줌마를 만났다. 카레스키야는 Korea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구소련 거주 한인들을 말한다. 그녀는 길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물김치와 반찬 몇 가지를 팔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음식을 팔고 있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과 똑같다. 내가 고려인이냐고 묻자 그렇단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부터 하고 사진을 몇 컷 찍었더니 먹어보라고 김치를 권한다. 시큼 달큼하면서도 맛은 시원했다. 북한식 물김치와 비슷했다.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이역만리 타쉬켄트까지 오게 되었을까?

카레스키야(고려인)란 1937년 스탈린 소련 정부가 연해주에 살던 조선족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 오지로 이주시킨 사람들을 말한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본과 전쟁 중이던 스탈린은 조선족들이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할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워 그들을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겪었던 쓰라린 과거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눈물겨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다른 나라로 강제 이주당한 역사는 일제시대 만은 아니다. 669년 4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고종은 반란의 우려가 있다하여 고구려 유민 38,300호를 강남 회남 산남 경서의 황무지에 강제 이주시켰다(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본기 제10장). 한 가족에 4명씩만 계산해도 약 15만 명이다. 당나라는 하서회랑에 있는 무위 부근에 고려주를 설치하고, 전투에 능한 고구려 출신 군사들을 여기에 주둔시켜 돌궐족과 싸우게 했다. 이에 앞서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도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장군 등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장안으로 끌고 갔다(삼국사기 28권 백제본기 제6장). 이들도 틀림없이 장안 서쪽 변방으로 강제 이주되어 서북방 유목민을 상대로 싸우는 방패막이가 되었을 것이다. 전쟁 포로를 신라가 아니고 당나라가 데려간 사실이나, 평양과 부여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당나라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한 사실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동방정벌 전략에 신라가 들러리를 섰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당나라는 동방정벌에 앞서 서역정벌에도 나서 651년에 소정방이 구자국(지금 쿠차)을 점령하고 안서도호부를 세운다. 그러니까 당나라는 동쪽 끝에 안동도호부, 서쪽 끝에 안서도호부를 세워 그 세력을 과시한 것이다. 실크로드는 이렇게 슬픈 우리 역사도 껴안고 있다. 무기력한 위정자들 때문에 애먼 백성들만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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