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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드 상인의 고향 사마르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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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2  21: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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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국까지 진출한 소그드인의 후손들
사마르칸트 택시 운전사 열에 아홉은 한국말을 잘한다. 반갑기도 하고 깜짝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본국으로 돌아와서 택시를 장만했다고 한다. 올해 쉰다섯인 악크말이라는 택시 기사는 남양주에 있는 스티로폼 공장에서 5년 동안 일했다고 한다. 어떤 총각은 재수가 없어서 1년 만에 불법체류자로 붙잡혀 강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나에게 주선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소그드인들의 후손들이 지금은 장안(시안)이 아니라 한국에까지 와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걸어서 육로를 통해서 이동했다면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만 달라졌을 뿐이다. 실크로드에 사는 사람들의 교류는 훨씬 광범위해지고 빨라졌을 뿐,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알렉산더대왕도 반한 도시
기원전 329년에 동방원정 길에 이 도시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 재위 기간 336-323)도 “사마르칸트(당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라칸다라 불렀다)에 대해 내가 들은 모든 소문은 사실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제외하고는.” 이라고 격찬하면서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혜초(704?-780?)는 <왕오천축국전>에서 호국(胡國)의 하나로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유독 강국에만 절이 하나 있고 승려가 한 명 있기는 하나, 그 또한 (불법을) 해득하여 경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 당시에 이 지역에서 불교는 이미 쇠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기원전 5세기경에 터를 잡은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더가 정복했을 당시에도 이미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로서 중국과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1220년에 징기스칸에 의해 초토화되기 전까지 서기 6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여러 왕조의 수도로서 지금보다 더 전성기를 누렸다. 구 사마르칸트는 아프라시압이라고 불리며 현재의 도시 중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1336 -1405)이 1370년에 이 도시를 티무르 제국(1369-1508)의 수도로 삼고 재건에 나섰다. 티무르는 정치상의 중심지 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이 도시를 성장시켰다. 1449년까지 통치했던 그의 손자 울르그백은 이곳을 지식과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키워 명실상부한 ‘세계의 수도’로 만들어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보고 싶어 했던 도시로 가꾸었다. 16세기에는 우즈백의 샤바니드 왕조에게 멸망하여 수도가 부하라로 옮겨가면서 이 도시는 쇠망하게 된다. 그 후 수차례 크고 작은 지진에 시달리다가 1868년에 러시아에 복속되었다. 1924년에는 구소련 우즈백공화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가, 6년 후에는 수도를 타쉬켄트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도시 규모는 타쉬켄트가 훨씬 더 크다.                 

실크로드에서 사마르칸트는 장안과 바그다드와 비잔티움(이스탄불)과 어깨를 겨루는 도시였다. 지리적으로도 동서양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티무르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당시에는 ‘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대단한 도시였다. 바로 이곳이 실크로드의 무역을 독점했던 소그드 상인들의 고향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여기에 오고 싶었다. 그동안 동서양의 여러 박물관에서 낙타에 물건을 가득 실은 소그드인 조각상을 많이 보았다. 특히 파리에 있는 기메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은 정말 정교하고 생생해서 정말 소그드 상인이 낙타를 끌고 사막을 걸어가는 듯했다. 또한 실크로드에 관한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소그드 상인이 반드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신라의 처용가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경주 괘릉과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원성왕릉 앞을 지키는 서역인 무인상, 그리고 경주 황성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호인용(胡人俑)도 소그드인 또는 아랍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국제 장사꾼 소그드 상인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에서 소그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열린 중앙아시아의 대교역로였고, 그 중심지가 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나오는 자라후샨(‘황금을 뿌린다’는 의미)강 유역의 옥토를 중심으로 하는 소그드 지방이었다. 이 지역에 사는 페르시아(이란)계 소그드인은 대부분이 조로아스터 교도들로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상업 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열심히 카라반을 조직해 장안까지 들어왔으며, 대부분이 서시(西市) 주변에 정착하여 보석 융단 향료의 판매나 금융업에 종사했다. 그들의 장사수완은 중국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구당서(舊唐書)> 등에는 “소그드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반드시 아기의 입안에 설탕을 머금게 하고 손에는 아교의 재료가 되는 풀을 쥐어 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설탕처럼 좋은 말만 하고 아교가 달라붙듯이 한번 쥔 돈은 절대 놓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신도를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을 ‘살보(薩寶)’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소그드어로 대상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사르토파우’의 음역이었다. 그 지위는 대부분 소그드인들이 차지했다. 소그드인의 출신지는 그 사람의 성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사마르칸트 출신은 강(康)을, 부하라 출신은 안(安)을, 키슈 출신은 사(史) 라는 성을 썼다. 안사의 난의 지도자 안록산과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를 살해한 사사명도 소그드인의 피를 이어 받았다. 당대에 호인(胡人)이라고 부를 경우에는 소그드인을 가리킬 때가 많았다. 

이들의 조상들은 8세기에 아랍군의 침략을 받고 지금의 펜지켄트(현재 사마르칸트 서쪽에 있는 타지크스탄의 도시)에서 맹렬히 싸웠으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머그산 요새로 도망친 소그드인의 후손들 약 3천 명이 타지키스탄의 수도인 두샨배 북쪽에 있는 야그노브산 계곡 일대에 야그노브어-소그드어 방언의 일종을 구사하며 아직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계약서를 작성할 정도로 일상생활에서도 거래를 분명히 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 증거가 하나 있다. 1932년에 제라브샨 산맥 부근에서 한 양치기가 버드나무로 짠 바구니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서는 소그드어로 다음과 같이 적힌 혼인계약서 하나가 나왔다.  

신랑 우테진은 신부 최태를 맞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며, 신부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동의 없이 다른 여자를 취하면 아내에게 30드라크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아내가 가져온 모든 물건을 돌려주고 이혼해야 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서기 710년 3월 25일 작성. (출처:NHK <실크로드> 중에서)     

천오백 년 전에 이미 성혼계약서를 작성한 걸 보면 정말 상인정신이 투철했던 민족으로 보인다. 이들은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의무적으로 외국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 했을 정도로 상거래를 중요시 했다. 아마도 전 세계를 상대로 상거래를 펼쳤던 아라비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상술을 가진 민족이었을 것이다. 일본인 작곡가 키타로가 작곡한 ‘실크로드’ 주제곡을 듣고 있으면 소그드 대상들이 낙타에 물건을 가득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들의 발길은 서쪽으로 안티오카 등 로마제국이었던 지중해 연안 도시부터 동쪽으로는 당나라 장안과 더 나아가서 신라의 고도 경주와 일본의 고도 나라까지 닿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이들은 장사 뿐 아니라 정치에도 참여했다. 안록산 같은 사람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절도사까지 올라가 마침내 당나라를 급격히 쇠약하게 만든 난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소그드인이었고, 어머니는 돌궐족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에서도 소그드인들은 이색적인 용모와 타고난 사교술로 권력자들의 환심을 산 것으로 보인다. 권력자들은 외래인의 이색적인 위용을 빌려 이들을 정치 자문역이나 무인으로 고용하여 권력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들이 취급하는 국제 무역품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동하면서 얻은 외국에 대한 정치, 군사, 종교, 문화, 예술 등에 관한 정보는 유력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에 중국 양주에서 감진대사(鑑眞大師)와 함께 건너온 안여보(安如寶)가 소그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나중에 당초제사의 제2대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들의 후손들이 한국까지 진출하여 저임금 업종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일부 청년들은 중국 장안이 아니라 춘천까지 유학을 오고 있다. 소그드인들의 글로벌 마인드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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