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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스탄과 티무르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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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6  15: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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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레기스탄

나는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자마자 레기스탄으로 달려갔다. 그만큼 보고 싶었던 곳이다. 레기스탄은 정말 소문대로 장엄했다. 정면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면 왼쪽으로 울르그백 메드레세(학교), 오른쪽으로 시르 도르 메드레세, 그리고 정면에 틸랴 카리 메드레세가 내려다 보인다. 이 세 메드레세 사이에는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관람자들이 앉아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 있다. 푸른색 타일을 주로 사용하여 지붕 돔을 장식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푸른색의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다. 푸른색을 하늘이라고 믿었던 이슬람 교도들은 그런 믿음을 종교생활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보았던 푸른색이 진한 감청색이라면, 레기스턴의 푸른색은 은은한 에메랄드 빛이 나는 하늘색이다.    

티무르의 손자로 1409년부터 1449년까지 사마르칸트를 통치했던 학자 군주 울루그백은 이 도시를 문예부흥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420년에는 레기스탄(Registan, ‘레기’는 타지크어로 모래라는 뜻이고, ‘스탄’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레기스탄은 모래 땅이다) 광장에 울르그백(Ulugbek) 메드레세를 세워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학생들을 모아 이슬람 신학과 세속 학문을 가르쳤다. 자신이 직접 신학과 천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메드레세에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문장을 새기기도 했다.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다’, ‘이 장려한 외관은 하늘 높이와 무게의 두 배로 지구의 중심축을 흔들 것이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정말이지 이 메드레세 전면에 세워진 35미터 높이의 두 개의 미나레트(원형 탑)는 하늘에 닿을 만큼 장엄하다. 경외한 신에게 얼마나 다가가고 싶었으면 저렇게 높은 탑을 지었을까---. 

시르 도르(Sher Dor 시르 도르는 ‘용맹한 사자’라는 뜻이다) 메드레세는 이 지방을 통치했던 얄라투쉬 바하지르가 1636년에 지었다. 이 메드레세는 이슬람 건축에서 금기시하는 사람과 동물을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정면 아취 위에는 사슴을 쫓는 사자(호피 무늬 때문에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가 양쪽에 그려져 있고, 사자 등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 건축가는 이 그림의 이단성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그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고 한다.          

틸랴 카리(Tilla-Kari 틸랴 카리는 ‘황금을 입힌’이라는 뜻이다) 메드레세는 이 지방을 통치했던 얄라투쉬 바하지르가 1636년에 지었다. 이 건물은 광장 정면을 보고 있으며 울루백과 시르 도르 메르레사 사이에 공간적인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비비하눔과 페르시아 건축가의 슬픈 사랑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레기스탄을 거쳐 비비하눔, 하즈라 히즈르 모스크, 샤흐진다, 구르 에 아미르 모술렘, 악 사례가 모술렘, 아프로시압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비비하눔은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중국에서 시집 온 아내 비비를 위해 지은 사원이다. 하눔은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1404년 10월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던 에스파냐의 외교 사절 곤잘레스 드 끌라비호는 비비하눔을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원’이라고 격찬했다. 그러나 이 사원에는 비비와 그녀를 사랑했던 페르시아 건축가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다. 이 건축가는 티무르의 원정 중에 사원의 건축을 재촉하던 비비의 미모에 빠져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비비는 여러 차례 거부하다가 마침내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볼에 키스를 허락한다. 이 운명의 키스는 흔적을 남기게 되고, 티무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비는 자신이 지었던 50미터의 미나레트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했고, 이 건축가는 하늘을 나는 카펫을 타고 페르시아로 달아났다. 길 건너 비비하눔 맞은편에는 푸른빛의 돔이 아름다운 비비의 무덤이 무심하게 서있다.      

구르 에 아미르(GUR-E-AMIR,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뜻) 모술렘은 티무르와 아들 그리고 스승의 묘가 모여 있는 곳이다. 천장과 벽의 황금 문양들이 정말 환상적이다. 유럽의 교회나 불교 석굴들의 벽화나 천장화도 전성기에는 저렇게 화려하고 찬란하지 않았을까? 티무르의 묘는 가묘와 진묘가 분리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 관광객들이 보는 까만 대리석 묘는 가짜 묘이고, 진짜 묘는 바로 아래 지하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하던 구소련의 사회과학원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1941년 6월 21일에 그 관을 열어보았다. 티무르는 170센티 정도의 키에 절름발이였고, 오른팔에도 부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손자 울르그백은 목이 잘린 채 묻혀 있었다. 전투 중 부상으로 오른발을 절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또 일어났다. 구르 에 아미르에는 오래전부터 ‘이 묘를 발굴하는 자는 나보다 더 험악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1941년 6월 22일에 구소련은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했다. 묘지의 문을 열면 화살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진시왕의 묘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만 알 뿐이다.         

샤흐진다(SAAH-I-ZINDA) 모술렘은 ‘살아있는 왕의 무덤’이란 뜻이다. 왕과 왕의 가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비록 2005년에 리모델링한 것이긴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에 속한다. 물론 오리지널은 아니지만 여기에 가면 청색 타일을 입힌 건물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특히 여성들을 위한 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정말 섬세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사마르칸트의 옛 모습을 보고 싶어 아프라시압 언덕에 올라갔으나 옛 영화는 간 데 없고 황량한 구릉과 벌판만 펼쳐져 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된 벽화와 유물을 통해 당시의 영화를 되새길 뿐이다. 벽화는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석굴에서 볼 수 있는 벽화보다 더 퇴락해서 그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 직원 중 한 명도 한국말을 잘한다. 한국 남양주 가구단지에서 3년간 일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택시로 내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사마르칸트 건설자 티무르대왕

사마르칸트를 여행하면서 이 도시를 건설한 티무르왕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336년 우즈백 남부 샤흐리샤브즈(당시는 캐쉬) 근처 호자 일가르 마을에서 태어났다. 25세가 되었을 때는 지방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바를라스 부족을 통합하여 캐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무르는 정복 전쟁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서쪽으로는 터키 동쪽까지, 동쪽으로는 중국과 인도 접경까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북으로는 남부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세계의 석학들과 예술가,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였고, 무역과 상거래를 장려하여 실크로드를 번영하게 만들었다. 티무르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중국인 왕비 비비하눔을 위해 모스크를 짓기도 했다. 그는 1405년 1월 명나라를 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가 감기에 걸려 지금의 카자흐스탄 오트라르에서 69세로 사망했다. 오트라르는 징기스칸이 처음으로 서방 원정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한 역사서에는 티무르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티무르 왕은 밤마다 수백 명의 신하를 불러 모아 동이 틀 때까지 연회를 배푼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술을 마시며, 양고기와 말고기를 푸짐하게 먹는다. 비록 그는 궁전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은 대형 천막에서 생활했다. 그 주변에는 수천 개의 천막이 있었으며, 원정 명령이 떨어지면 도시 전체는 순식간에 이동하기 시작한다.    

우리 대학 유학생 엘뤼아르네 집

마지막 날 우리 대학에 유학 온 학생인 엘뤼아르 부모님으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예쁜 대학생 동생이 호텔로 나를 데리러 왔다. 레기스탄 바로 앞에 있는 싸구려 호텔에서 거의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여동생은 영어를 잘했다. 나중에 아버지처럼 대학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가 국립병원 간호사이고, 아버지가 대학 교수인데도 집은 소박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자 마침 아버지가 러시아제 차를 새로 샀다면서 마당에 세워두고 흐뭇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엘뤼아르 부모님의 집에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를 비롯해서 여러 친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상이 차려져 있는데, 북한식과 비슷했다. 구소련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라 그런지 잔치상 차림새가 서로 닮아 있었다. 술, 음료수, 차, 사탕, 과자, 빵, 버터, 치즈 등이 나왔다. 어머니가 우리 한국 여인의 얼굴을 많이 닮아서 “한국 어머니 같다”고 하자 활짝 웃었다. 메르질롱(메르길란)에서 사온 비단 스카프를 드렸더니 목에 둘러보고는 정말 좋아하신다. 내게는 당신이 손수 만들었다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남자 저고리를 주셨다. 자고 가라는 걸 내일 새벽에 테르미즈로 가야 한다며 사양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길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며 택시비까지 쥐어 주신다. 영락없이 자애로운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지금도 실크로드는 이렇게 살아서 한국 사람이 소그드인의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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