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풍경을 그려본다. 수업 시간에 성실히 출석한다. 필기하고, 녹음하고, 질문한다. 시험이 다가오면 강의 내용을 공책에 다시 정리해본다. 시험을 치르고, 학기가 끝난다. 품을 들인 만큼 성적을 받는다. 성적이 우수하면 장학금도 받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이렇게 평가받아 왔다. 내용은 하나이고, 시험지도 하나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남들보다 적게 틀렸다는 거다. 배울 내용은 정해져 있다. 시험지에 오답을 하나 더 지우고자 오답공책을 한 번 더 벼리었다. 바라보는 건 바로 앞에 놓인 교과서와 공책뿐이다. 앞이 아닌 곳을 돌아볼 일은 없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앞만 바라본다. 교실은 강의실이 되었고, 선생은 교수가 되었다. 교수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혼자 볼 공책에 필기한다. 성적은 스스로 한 만큼 나온다고 믿는다. 관심은 앞에 놓인 내용을 내가 아느냐는 데에 있다. 옆 사람이 아는지, 모르는지, 지루한지, 막막한지는 관심에 없다. 게다가 상대평가이다. 남들이 잘하는 건 득이 되지 않는다.

문득 생각이 든다. 강의 교재는 이미 출판된 책이고, 강의 자체도 이미 마련된 내용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필기하고 있을까? 왜 강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각자 필기하고 있을까? 같은 내용이고, 이미 있는 내용인데 왜 우리는 수업 시간에 자기 앞을 바라보기에만 급급할까? 왜 우리는 서로 바라보지 않았는가? 혼자 잘 받은 성적은 또 무슨 소용인가?

저녁에 동아리 친구로부터 밥 한번 먹자는 연락이 온다. 밥은 술로 이어질 테고, 저녁이 다 지나갈 테다. 한가한 시간은 없다. 과제가 있다고 둘러댄다. 앞에는 여전히 교재와 공책이 놓여 있다. 처음 입학해서 이리저리 몰려다닐 때는 즐거웠는데 지금 나는 뭐가 문제일까. 한가한 생각이다 싶어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여기까지가 풍경이다.

왜 혼자 공부하는가? 혼자 할 공부라면 인터넷에도 강의는 있다. 함께 한 경험이 없으니 혼자서 할 줄밖에 모른다. 공부에는 경쟁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혼자 공부하는 시간과 자리를 옆 사람에게 내어 주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성적에 지장이 있으리란 우려가 들 수도 있다. 협력을 조성하게끔 수업 방법과 평가 제도를 다시 조율해야 하는 까닭이다. 자기부터 먼저 낸 마음이 희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학 수업이 갖는 이점은 곧장 질문할 수 있고, 옆 사람과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호 간에 묻고 답하고 논박하며 각자가 지닌 앎은 풍성해지고 정연해진다. 자기 목소리를 서로 주고받는 경험 자체도 즐겁다. 이번 학기에 듣는 한 수업에서 그 빛을 보았다. 혼자 하는 공부로는 제 깜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수업 시간이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자발적인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한정된 시간에 무엇을 얼마만큼 가르치고 배울지도 다시 조율해야 할 테다. 지식의 나열을 유대의 기쁨보다 우선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교재와 공책은 수업에 바탕이 되는 선에서 제 역할을 그치기를 바란다. 중요한 건,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앎으로 이끄는, 그리고 여태껏 생각해본 적 없는, 지금 중요한 큰 물음과 이 시간에 나누는 논의이다.

/박형준 철학ㆍ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