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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다’와 ‘설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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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29  1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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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책을 읽다가 ‘설다’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분명 아는 낱말인데, 내겐 ‘설다’라는 말이 왠지 낯설거나 입에 설었던 모양이다.『토박이말 쓰임사전』은 ‘설다’의 뜻풀이 뒤에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설다’의 말 뿌리가 ‘살다’와 같다면서 ‘설다’의 반대말은 ‘익다’이고 ‘살다’의 반대말은 ‘죽다’인데, ‘살다, 설다’는 생생한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고 ‘죽다, 익다’는 그 기운이 없어진 거라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건 ‘익다’와 ‘설다’의 반대 관계에서 막연한 짐작과는 달리 ‘익다’가 ‘설다’보다 긍정적이지 않고 그 반대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울러 ‘숙어(熟語)’라는 말이 곧 ‘익은 말’이라는 점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영어 단어, 숙어집을 끼고 달달 외며 서로의 어휘력을 경쟁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풋풋한 시절의 애틋했던 노력이 지금은 낯설고 치기어린 걸로 보일 만큼 이제 나는 ‘익어버린’ 사람이 되었고 죽음 또한 머지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좀 비감해지기도 했다.

한데 이런 내 생각은 또 전공인 문학, 그 중에서도 시(詩)로 뜬금없이 비약했다. 삶에 선 것들이 너무 많으면 삶은 불안하고 피로해질 것이다. 반면에 삶이 익은 것들 위주로 돌아간다면, 익은 말로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간다면 삶은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해서 사람들은 익은 것들로부터의 탈출, 이탈, 또는 일탈을 열망하고 꿈꾼다. 시는 그 같은 탈주, 또는 해방을 위한 특별한 시도이다. 그렇기에 시는 익은 것들을 의심하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고 괄목상대-이것도 익은 말의 하나이다-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입에 설고 낯선 걸 추구한다. 익은 건 곧 죽은 것, 죽는 것이기에.

우리는 삶의 무게에 눌려 살면서 문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게 진정 의미 있고 내가 원하는 삶인지 자문하고 곰곰 생각해본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어떤 길을 걸어왔나 돌아보고 계속 가야할지, 정말 내 길인지 생각해보는 게 시의 정신이고 자세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수많은 익은 말들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특히 익은 말(들)이 나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설익다’, ‘설자다’와 같은 맥락에서 ‘설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익다’와 ‘설다’의 상호관계가 내비치는 삶의 비의(秘義) 또는 근원적 모순에 맞닥뜨리는 것 같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내겐 너무 익은 캠퍼스를 젊은 피들이 수줍게 그렇지만 왁자하게 장악할 모습이 기대된다. 신입생들의 선 것들과 내 익은 것들을 물물교환할 생각을 하니 피돌기가 쩌릿해진다.

김번(영어영문ㆍ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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