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교양
우리 학교 설립자 일송 선생 이야기 ② 의학도의 길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5.14  12:24:0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 1941년 경성의전의 조선인 학생모임. 둘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일송.
   
▲ 1944년 백병원 사람들. 앞줄 왼쪽이 백인제 원장, 뒷줄 오른쪽이 일송.

평안도 소년

일송은 1921년에 평안도 남쪽에 자리 잡은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평안도는 조선시대에 유학(儒學)이 흥한 곳이 아니었다. 비주류 지역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상공업이 발전했고, 신문물ㆍ신학문에 대한 거부감도 적어, 한국 근대를 수놓은 많은 지도자와 지식인이 배출되었다.

평안도의 활력은 일송이 태어날 무렵에도 왕성했다. 일송이 자란 용강군은 평안도 최대의 항구 진남포에 인접해 있었다. 진남포는 지금 북한에서 ‘남포특별시’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요지이다. 용강군 일대 역시 일찍부터 개발되어 철도가 1906년에 놓였고 병원, 교회, 학교 등도 착착 세워졌다. 일송의 부친 윤경순은 제련소와 염전에서 일하며 가계를 꾸렸다. 또 일찍부터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었는데, 진남포 천주교회에 속한 광량만 공소를 홀로 세우다시피 했다.

일송은 어려서 광량만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33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에 입학했다. 지금의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한다. 당시 경기고등보통학교가 남쪽의 최고 명문이었다면, 평양고보는 북쪽의 제일 명문이었다. 평양고보 출신들은 해방 후에 반 이상 되는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사회 지도층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일송의 학생 생활은 지금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대가 문제였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7년에는 중ㆍ일전쟁이 발발했다. 193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한반도는 ‘총동원체제’에 접어들었다. 일제통치에 협력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반일 감정도 더 단단해졌다. 일송은 평양고보 시절 몰래 심훈의『상록수』등을 읽으며 민족의식과 계몽의식을 길렀다. 스스로를 ‘급조 민족주의자’라고도 여겼다.

당시 학제는 5년제였으므로 일송은 1938년에 평양고보를 졸업하였다. 원래는 졸업 후 공과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했다 한다. 그러나 부친은 “일본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 직업은 의사 밖에 없다”며 의대 진학을 권유했다. 이것으로 일송의 인생은 결정되었다. 하지만 첫 도전은 낙방이었다. 재수를 하고 1939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는 의사 양성을 주목적으로 조선총독부가 1916년에 설립했다. 해방 후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의학부와 통합되어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경성의전의 설립과 운영은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했지만, 한국인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의학도이면서 최고 수준의 엘리트였다. 식민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걸었던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에 부응하여 경성의전 학생들은 강한 민족의식과 사회계몽 활동으로 답했다. 일례로 3.1운동 때에 구금된 학생들 가운데 경성의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총독부는 한국인 입학생을 점차 줄여나갔고, 1930년대에 한국인 학생 비중은 1/4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의학 공부 외에도 그들은 활발한 학생 활동과 스포츠 활동을 전개했다. 일송은 전공 외 서적을 무척이나 열심히 읽었다. 철학, 역사, 문학, 경제학 등의 책을 왕성하게 읽었고, 금서였던 마르크스주의 서적이나 불온시 되었던 한국 문학도 꽤 읽었다. 축구부 활동도 열심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클럽은 일본 학생 위주였고, 오로지 축구부만 한국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축구부 부장도 한국인 교수 백인제였다. 때문에 축구부는 차별에 맞서는 일종의 ‘해방구’ 구실을 했다. 당시의 비장했던 마음가짐과 때때로 일어났던 충돌에 대해 일송의 회고를 소개한다.

일본인 학생들과의 혈투는 다반사였고 매일 매일의 학교 시간은 폭풍을 잉태한 풍운의 나날이었다. … 한인 학생들만이 참가하는 유일한 운동부가 축구였기에, 축구부 부원인 나는 언제나 일본인들만으로 구성된 여러 운동부원들과 때때로 육탄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워서 싸운 것도 아니요, 신세대 구세대가 되어서 싸운 것도 아니요, 사소한 시기와 모략으로 싸운 것도 아니요, 그야말로 그때는 그때대로의 민족의식에서의 혈투였으니 말이다. (윤덕선, 1963년)

암울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일송과 그의 동료들은 검소하게 생활하기로 맹세했고 연애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경성의전에서는 스승 백인제와 인연을 맺었다. 우리나라 외과의 초석을 놓은 백인제는 1899년에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에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3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였다. 3.1운동에 참여해서 퇴학되었으나 복학했고, 이후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28년에 경성의전 외과학 주임교수가 되었다. 당시 외과의 대가로서 명성이 자자했고 한국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다.

백인제는 뛰어난 외과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자들 가운데 선배 그룹에서는 장기려, 김희규가 뛰어났고, 후배 중에서는 일송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훗날 장기려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게 되었고, 김희규는 백인제의 뒤를 이어 백병원 2대 원장이 되었다. 일송은 가톨릭의대를 성장시켰고 한림대학교와 한림대학교의료원을 세웠으니,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의학계의 큰 나무였다고 할 수 있다.

 

백병원 수련기

일송이 경성의전에 재학할 무렵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도발했다. 군의(軍醫) 인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경성의전 교육 연한을 단축했고, 일송은 3년 만인 1942년 3월에 경성의전을 졸업하였다. 한편 백인제는 1941년에 경성의전 교수직을 사임하고 백병원을 차린 상태였다. 서울 중구에 자리 잡은 백병원은 당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백인제는 일송을 불러 백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게 했다.

수련의 생활은 무척 고되었다. 한밤중에 병원 전체를 순찰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가벼운 아침 운동을 하고 환자를 돌보았다. 9시 정각에는 백인제 선생에게 브리핑을 했다. 오전에는 외래환자를 진료, 입원환자 회진 및 그 뒤처리를 하고 오후 3시부터는 계속 수술을 하였다. 백병원 근무는 새벽부터 밤까지 회진, 수술, 당직이 이어지는 고된 기간이었다. 훗날 일송은 이 시기를 ‘그야말로 쉴 줄 모르고 달리는 전동차’ 같은 수련기였다고 회고하였다.

백병원에서 생활할 때 일송은 한 간호사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윤봉옥이란 여성으로 강원도에서 간호 일을 하다, 병원장의 추천으로 간호사 시험을 보고 백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만나 사귀게 된 두 사람은 1944년에 서로의 반려자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경구 한림과학원ㆍ부원장

한림학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보도] 학우들 마음속 ‘그림’으로 남은 대동제
2
[보도] 대동제, 이색 프로그램ㆍ부스로 열기 후끈!
3
[보도] 모두가 즐긴 축제, 쓰레기 처리 등 빈틈도
4
[보도] 개교 40주년, “이젠 자신감으로 100년의 도약을”
5
[보도] 함께 뛰며 하나되는 ‘한림 어울림 한마당’
6
[보도] 군 공백기 최소화, 이러닝 학점 취득
7
[보도] 학생·교직원·주민 한마음 산행 “개교 40주년 축하해요”
8
[보도] 다채로운 체험이 있는 박물관으로 오세요~
9
[보도] 빅데이터 시대, 데이터 분석 무상교육부터 자격취득까지
10
[시사] 곳곳에서 ‘히잡시위’, 이란 이슬람 정권 변화 생기나
신문사소개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4252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학길 1 캠퍼스라이프센터 9-308호 한림학보사
제보 및 문의 : news@hallym.ac.kr / 033-248-287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지혜수(간사)
Copyright © 2005 한림학보. All rights reserved. news@hally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