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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설립자 일송 선생 이야기 ③ 도전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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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1  13:5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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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후반 가톨릭 의과대학 외과 수술 장면
   
▲ 1967년 의사 동료들과 함께. 가운데 검은 양복이 일송, 그 오른쪽이 장기려이다.

분단과 한국전쟁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다가왔다. 그 무렵 일송은 고향 근처에서 작은 병원을 열었다. 강제로 징집되어 의미 없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선 개업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병원 이름은 ‘성심의원’이었다. 20대 중반의 젊음과 패기가 넘쳤던 때였던지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해방. 감격에 뒤이어 큰 혼란이 따라왔다. 의사로서 신망을 얻었던 일송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의 후생부장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일송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와 소련군의 만행에 염증을 느꼈던 일송 가족은 남쪽으로 내려왔고, 뒤이어 부모형제가 내려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빈털터리가 된 일송은 스승 백인제와 지인들에게 빌린 돈으로 충청도 홍성에서 다시 병원을 열었다.

병원이 정상화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월남 인사’였던 일송은 동생 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충청도에서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다시 충청도로 올라왔다. 5개월 동안 2,000여 리(里)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일송 형제는 육군 병원에 소속되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낙동강 전투를 목격했다. 한때는 인민군에 소속되는 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기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굶주림, 병, 총격, 폭격, 인민군의 잔학한 행위, 우익의 보복 등 처절한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보았다. 대학 친구 하나는 좌ㆍ우익을 오가다 화형 당했고, 좌익이 되어 일송을 저주한 친구도 있었다. 일송 형제 또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차라리 가족이나 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충청도로 돌아오니,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이처럼 지독하게 한국전쟁을 겪은 일송은 훗날 전쟁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통일을 위해서라할지라도 전쟁은 불가하다고 했다. 또한 일송은 극단적인 이념을 대변하는 강경한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갈망이 컸고, 성찰과 화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백병원 재건과 미국 유학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는 의사 일송의 스승 백인제는 한국전쟁 때 북한에 끌려갔다. 때문에 일송의 선배 김희규와 백인제의 조카 백낙환 등이 백병원 재건을 시작했다. 그들은 일송을 불렀고, 일송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기자재를 빌리고, 미군병원 등에서 원조를 구했다. 없는 도구는 만들어가며 병원을 운영했다.

전시 상황에는 혈액 공급이 큰 문제였다. 일송은 보존혈액 기술을 배우고 기자재를 원조 받아 백병원 내에 혈액원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혈액원이다. 당시 일송의 풍모에 매우 감명 받은 사람은 백낙환이었다. 일송보다 5살 아래인 그는 일송을 자신의 모델로 여겼다. 그는 백병원을 성장시켰고 훗날 인제대학교와 인제대학교 백병원 등을 설립하게 된다.

한편 일송과 알게 된 미국 군의관들은 미국 유학을 권했다. 세계 의학은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미국 의학이 눈부시게 성장하였고, 2차 대전 무렵에는 세계 의학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외과를 전공한 미국의 젊은 의사들 또한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한층 의술을 높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젊은 의사들에게 미국 유학을 대거 주선했는데, 일송 또한 그 흐름에 있었던 것이다.

일송은 미국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브릿지포트 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고 2년 동안 정신없이 공부했다. 유학 도중에 일송은 백인제의 의술 위에 자신의 경험과 미국에서의 배움을 결합한 자신만의 의술을 정립하게 되었다.

 

가톨릭 의과대학

일송은 1956년에 돌연 귀국했는데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를 설립했으나, 운영이 힘들어 고려대학교에 인계하려했다. 그런데 양기섭 신부가 나서서 의과대 존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양 신부는 일송이 다녔던 진남포 성당의 주임 신부로, 일송의 결혼식 주례까지 맡았던 인연이 있었다. 그가 일송을 불러 의대 교육을 전담시키다시피 한 것이다. 일송은 30대 중반에 가톨릭 의과대 교육의 중추를 맡게 되었다.

일송이 부임했을 무렵, 가톨릭 의대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일송은 먼저 유능한 교수진부터 구성했다. 의학계에서 명성 높은 기용숙, 김희규, 장기려 등을 불렀다. 뒤이어 전종휘, 이용각, 조규상 등 중진 교수들도 속속 들어와 최고의 교수진을 자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었다. 당시는 입학 업무가 정상이 아니어서 미등록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학생 중에는 심지어 명동의 ‘주먹’까지 있었다. 일송은 부임 후 그들을 엄격하게 정리하고 교육시켰다. 그렇게 해서 1960년에 첫 졸업생 39명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의대 고시에 합격했다. 일송은 졸업생을 배출한 소감으로 “나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은 학생들에게 특별히 친밀하고 가족 같은 따스한 정을 느낀다”며 “우리 대학의 전통을 세울 개척자가 되라”고 격려했다.

2ㆍ3회 졸업생들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1960년에 4ㆍ19 혁명이 일어났는데, 가톨릭 의대에서는 일송과 교수진, 신부, 수녀 모두가 학생들과 함께 혁명에 참여했다. 일송은 “악법과 부패와 타락의 도가니에 뛰어드는 그대에게 히포크라테스의 혼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일송과 교수, 신부들의 노력으로 가톨릭 의대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1961년에는 명동성당 옆에 가톨릭 의과대학 성모병원이 신축되었다. 전면이 유리로 덮인 이 병원은 당시에는 대단한 규모와 첨단 시설을 자랑했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한뉴스’에 자주 등장할 정도였다. 가톨릭 성모병원의 설립과 함께 병원의 체제도 바뀌었다. 1962년에는 8개의 부속병원, 3개의 교육 기관을 거느린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교육-연구-임상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일송은 초대 의무원장으로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졌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자라는 법. 운영을 책임지는 신부ㆍ수녀와, 전문가인 의사 사이에 미묘한 견해차가 자라났다. 그리고 의료원의 경영 문제에서 신부와 교수 간 갈등이 더 커졌다. 일송은 일단의 책임을 지고 1968년에 가톨릭 의대를 사직했다. 13명의 교수도 함께 퇴직했다. 일송은 젊음을 바쳐 일한 가톨릭 의대를 훌훌 털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다음 호에 계속.)


/ 이경구(한림과학원ㆍ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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