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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어와 진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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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6  19: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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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가주어와 진주어란 용어를 마주치게 된다. 가주어란 형식적인 주어일 뿐인 것으로 뒤에 나오는 진짜 주어를 앞서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즉, 자체의 내용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가짜 주어, 텅 빈 주어이다. ‘It’s a pleasure to meet you here.’라는 문장에서 it이 가주어이고 to 부정사 부분이 진주어이다. 성가실 수도 있는 영문법에 관한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 용어들이 우리의 삶에도 견주어볼 만한 데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예컨대, ‘나는 내 인생의 진주어인가 가주어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이런 물음을 조금은 진지하게 파고들어 따져보면 내 삶에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참으로 빈약하다는 것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가령, 김광규 시인이 ‘나’라는 시에서 펼쳐 보인 바 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고 내 아들의 아버지고 내 학생의 선생이고 내 선생의 학생이고 가장이고 납세자고 손님이고 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련의 관습적 관계 체계 속에 꽁꽁 포박되어 있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불안한 의문을 애써 외면한 채 짐짓 자기 삶의 진짜 주인 행세를 한다. 가주어처럼 말이다. 혹은 죽었는데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좀비를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어떤 이가 자신이 가주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면 아마도 그는 ‘진주어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찾을 것이다. 한데 진주어를 묻고 찾는 일은 왕왕 지난한 혼돈, 고통 및 회의의 과정을 수반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초입에서 나가떨어지기 일쑤이고 패잔병처럼 다시 가주어로 돌아간다.

어쩌면 내가 방심해 아무렇게나 방치해둔 내 삶의 주인 자리를 어느 무도한 자 또는 세력이 슬쩍 점령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점령 기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그의 주인됨 또는 진주어됨과 나의 가주어됨 또는 좀비됨도 그만큼 공고화된다. 그리하여 분명 나의 것을 뺏겼는데도 뺏겼다는 생각을 못하고 무도한 주인에게 굽실거리고 빌붙게 된다. 나를 찾고 나의 자리를 지키려는 생각과 노력이 없으면 언제든 우리는 무도한 이들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기회만 주어지면 그렇게 무도해질 수 있는 이들과 세력이 얼마든지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명문 ‘Welton Academy’의 학생들은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곁눈 가리개를 하고 죽자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학교의 엄격한 기율과 통제에 순응한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Welton을 ‘Hellton’(‘헬조선’에 근사하다)이라 부르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를 결성해 밤에 몰래 학교 밖 동굴에 모여 시를 읽는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고 살거나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주어입니까, 아니면 가주어입니까?

/ 김번(영어영문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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