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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흐름 속에 인간의 진정한 문명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한림교양필독서'서평대회 금상 당선작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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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26  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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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각각의 독자적인 문화와 문명만으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거치며 인류는 하나의 결집된 무언가로 묶이게 되었다. 즉, 세계 각국은 하나의 독자적인 국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운명체를 함께 영위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자 하는 풍토가 21세기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를 거치며 어떠한 본질을 잃고 있다. 요한 하위징아는 이러한 사회적 풍토가 놀이의 본질을 결여시킨다고 보았다.

하위징아의 이론 이전까지는 놀이를 그저 ‘수단’으로써의 의미로 해석해 왔지만, 반대로 그는 독립적인 의미로서 ‘놀이’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놀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자발적이다. 놀이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외부의 강제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실행하거나 중지할 수 있다. 두 번째, 이러한 놀이는 일상생활과는 다르며, ‘일시’적인 것이다. 놀이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그 순간 일상과는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세 번째, 그렇지만 진지함과 분리되는 요소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놀이’와 ‘진지함’을 상반된 관계로 생각하지만 ‘놀이’는 ‘진지함’을 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진지함’은 ‘놀이’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다. 즉, 놀이는 진지함을 수반하는 경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이는 규칙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하나의 규칙이 된다. 이때, 놀이는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놀이가 어떠한 공간, 예를 들면, 마법의 원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놀이는 그 속에서 무엇이 통용되는지 결정한다.

이처럼 놀이의 다양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하위징아는 ‘놀이’를 미학의 개념으로 결론짓는다. ‘놀이’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긴장, 안정, 장기적 반복 등을 통해 긴장을 해소하고 안정이 일상의 보완 요소로써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평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결국, 진정한 문명은 순수한 놀이 속에서 출발해 인간의 이성이나 믿음, 인간성 등을 훼손하지 않는 부분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호모루덴스』를 현대사회의 동향과 함께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각도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호모루덴스의 ‘의미’에 대해 집중했다. ‘왜’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보았을까. 인간의 본질적인 행태에 있어서, ‘놀이’는 평화와 화합을 가져오는 행위라 믿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과거 고대시대에 갖고 있던 놀이의 아곤(경기, 경연)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전쟁’이란 형태로 변질되었고, 하위징아는 이로 인한 문명의 퇴화를 걱정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대의 지혜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과거 문명이 고상한 놀이에 뿌리를 내려 발전해 온 것을 고려했을 때, 고상하고 위엄을 갖추었던 놀이에서 천박한 것으로 그 위신이 떨어져 버렸다. 현대 문명은 스스로 그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던 ‘놀이’의 성격을 잊지 말고 놀이의 요소를 무시하지 않길 경고하고 있다. 놀이가 갖는 ‘규칙준수’는 현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절대로 위배되거나 파괴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가 붕괴되고, 곧 사회는 야만과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이후 현대 문명은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렸다. 고도의 문화를 갖춘, 문명이란 ‘탈’을 쓴 국가들에 의해 이 규칙은 파괴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지키지 않는 예의와 규칙을 지켜야 한다며 국제 체계 속에서 외치고 있다. 이는 하위징아가 그토록 우려했던 모습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문명’은 더 이상 문명이 아니라 원시적인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시간이 갈수록 현대 문명은 발전이 아니라 과거로 후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구 사회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야만’의 행태로 말이다.

조지오월은 ‘빅 브라더’가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1세기의 ‘빅 브라더’는 자본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지배는 자본의 힘이자, 곧 세계 권력 구조이다. 촘스키가 비판하는 ‘세계화’는 결국 하위징아가 말하는 놀이의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실제로는 그 뒤에 숨어 정치적 의도를 감춘다. 우리는 이 ‘가짜놀이’에 속아서 새로운 패권에 지배당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도덕과 윤리를 중요시하는 서구 문명들은 표면적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없앤 듯하다. 그러나 아리기의 ‘세계체제론’따르면, 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가면을 쓰고 세 것이다. 그럴듯한 놀이의 형태를 앞세워, 세계화 속에 숨어있다. 국제법률 속에, 국제협약 속에, 국제금융 속에 말이다. 하위징아는 이 문명국가의 이기(利己) 때문에 놀이를 법률, 약속, 전쟁 등의 측면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많은 기업이나, 세계의 자본가들이 열광하는 ‘세계화’는 결국 힘이 있는, 돈이 있는 이들의 권력과 지배 속에서 놀아나고 있으며, 그럴싸하게 포장해놓은 ‘세계화’는 결국 포스트식민주의와 포스트제국주의의 결과인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패권들에 맞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계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요한 하위징아의 경고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하위징아가 우려했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반성을 통해 진정한 문명이란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1세기의 혼재(混在) 안에서,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듯이, 우리 앞에도 ‘빨간 알약’과‘파란 알약’이 놓여 있다.

‘세계화’의 또 다른 이면 앞에서 어떤 알약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김소정(국어국문ㆍ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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