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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의 여행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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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9  10: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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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빛 알갱이입니다. 물리학자들은 저를 광자(Photon)라 부르죠. 빛을 넘실대는 파동이라 생각하시겠지만 그 빛의 에너지는 우리처럼 작은 덩어리들이 나른답니다. 우리는 엄청난 압력과 온도로 핵융합이 일어나는 태양의 중심에서 태어납니다. 고밀도 플라즈마 속 수소핵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백만 년의 시간을 올라와 태양 표면에 간신히 닿으면 당신들의 고향별, 지구를 향해 떠날 준비가 끝납니다.

몇 주 전 지구로 떠난 빛 알갱이 친구들의 운명을 얘기해 볼까요? 태양의 표면에서 출발해 8분의 시간을 날아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달의 표면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를 가로막아 친구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죠. 덕분에 지구 곳곳에서 개기일식의 장관이 펼쳐졌다더군요. 눈부신 태양을 달이 완전히 감싼 이 분의 시간.. 어둠에 잠긴 고요한 대지 위로 검은 달을 휘감아 황홀하게 타올랐을 태양의 코로나를 본 그 순간, 당신들은 인생의 찰나와 우주의 영겁이 조우함을 본 것은 아닐까요? 지구행이 좌절되어 달의 표면에서 반사된 친구들의 운명은 저도 모릅니다. 일부 친구들은 혜성의 고향인 오르트 구름을 뚫고 250만년을 더 날아가 안드로메다은하에 가닿았을지도 모르죠.

지구는 가장 가고 싶은 곳입니다. 대적점의 소용돌이를 과시하는 목성도, 띠를 허리에 두르고 한껏 뽐내는 토성도, 거대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엔셀라두스도 아름다고 신기합니다. 그러나 지구는 무엇보다도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수십억 년 전 빛 알갱이들이 끝없이 실어나르는 에너지를 머금고 탄생한 생명의 씨앗이 지구 상 모든 곳으로 뻗어나가 생동하는 기운을 퍼뜨립니다. 태양계 어느 곳에서도 절대 볼 수 없는 장관이지요. 생명의 푸른 기운은 이 먼 우주 공간에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구를 향한 빛 알갱이들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비록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지구를 금성의 운명으로 위태롭게 몰아붙여도, 인간과의 공존을 힘겹게 버텨온 종들이 사라져 결국 인간과 가축, 작물들만의 세상이 되어 파멸되더라도, 그래도 지구를 향한 우리들의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멸종한 후에도 지구는 풍부한 대양과 대기를 품고 새 생명을 잉태해 나갈 거라 믿으니까요.

이제 저는 태양 속 백만 년의 시간을 잊고 마지막 8분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저는 이 짧은 여행의 종착지를 모릅니다. 거대한 구름을 만나 산란되며 푸른 바다 속으로 들어갈지도, 소나기 후 태어난 물방울들을 만나 굴절되며 찬란한 무지개 빛의 편린으로 사라질지도, 혹은 그저 대기 속 분자들과 부딪히며 흩뿌려져 여러분의 눈 속에 푸른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건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목격한 그 장면 하나하나가 바로 우주와의 조우라는 것을. 차가운 우주 공간을 날아온 우리들의 에너지가 지구, 그 속의 생명과 만나는 운명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고재현(응용물리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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