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최근 2~3년 한국 사회에 대중적 페미니즘의 열기를 지핀 책들이다. 그간 불편했지만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거나, 문제를 알았더라도 외면하고 침묵해 왔던 페미니즘 관련 이슈들이 언어로, 현장의 행동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 수상한(!) 열기는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문단과 예술계의 성폭력 같은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여성폭력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의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나온 담론적 저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한국사회의 현실에 밀착해 드러낸 저작의 맨 앞자리에 『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 『 82년생 김지영 』(조남주)이 놓여 있다. 이 책들은 그 동안 이론과 아카데미즘의 틀에 갇혀 있던 페미니즘을 거리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 곁으로 가져와 생생하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조남주의 『 82년생 김지영 』은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라는 출판사 소개 글처럼 소설로 쓴 여성학 교과서이다.

소설은 82년생 김지영 씨가 태어난 1982년부터 초등학생 시기(1982년~1994년), 중고등학생 시기(1995년~2000년), 대학과 직장 생활 시기(2001년~2011년), 결혼과 출산,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 시기(2012년~2015년). 이렇게 네 시기로 장이 나뉘어 연대기순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이 짧은 연대기에 담긴 사연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1982년~1994년’ 유년기와 초등학생 시절부터 김지영 씨는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성 감별과 여아 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현실, 출석번호마저도 남학생부터 시작하는 현실과 맞닥뜨린다. 이런 부당함은 ‘1995년~2000년’ 중고등학생 시기가 되자 여성이라는 성별 표식이 분명해지면서 교실과 학원, 거리에서 성희롱과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학 시절과 취준생을 거쳐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시기를 다룬 ‘2001년~2011년’ 장은 동아리, 연애와 같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여성차별적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가령 연애를 했던 이력이 있는 여성을 “씹다 버린 껌”에 비유한다든가, 아무리 여학생이 똑똑하고 스펙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기업 추천서를 쓸 때 남학생에게 밀리는 정황을 보여준다. 그뿐인가. 면접장에서도, 직장 회식 자리에서도 김지영 씨는 성희롱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 주요 업무에서 남성 동기들에게 밀려나거나 임금에 격차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 좌절하기도 한다. ‘2012년~2015년’장에서는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가 여성에게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전업주부와 가사노동, 모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 잣대 속에서 여성을 사적 영역인 집안에 가두는 잠금장치가 되었다고 말한다. 소설은 모성을 여성에게 생래적으로 주어진 성스러운 자질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일과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운 엄마를 ‘맘충’이라는 모멸감어린 단어로 호명하는 야만적인 현실 속에서 평범한 김지영 씨가 서서히 ‘자기’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독자를 설득한다. 때문에 김지영 씨의 일대기를 감싸고 있는 겉 이야기는 우울증에 걸린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가 듣고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독특함은 여성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각종 통계와 신문기사, 책을 곳곳에 인용으로 혹은 각주로 배치한 데 있다. 1999년 여성차별금지법 제정, 2001년 여성부 신설, 2008년 호주제 폐지로 한국 사회는 성평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소설에 재현된 김지영 씨의 삶, 그리고 남녀성비불균형, 육아휴직제도 비율, 남녀임금격차, 유리천장 지수,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률 등과 같은 수치는 성차별적 요소가 여전히 ‘팩트(fact)’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은 허구와 르포르타주의 경계를 허물고, 지금/여기 여성의 현실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형식적 실험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 82년생 김지영 』을 ‘소설로 쓴 여성학 교과서’라고 칭했다. 소설을 비평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자면 문학적 형상화의 측면에서는 김지영 씨의 인생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허구의 의장을 벗어던지고 현실의 민낯을 여지없이 노출한 것이 불편하게 읽히기도 한다.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한 나의 독서 이력에 비춰볼 때 일찍이 남아선호사상을 소설화한 박완서의 『 꿈꾸는 인큐베이터 』, 90년대 초반 대표적인 페미니즘 소설인 이경자의 『 절반의 실패 』와 2000년대 작가인 조남주의 『 82년생 김지영 』이 여성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이라는 측면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걸린 김지영 씨, 죽은 어머니나 친구의 입을 빌려서야 자기의 속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김지영 씨가 현재 우리의 모습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김지영 씨의 부당함과 고통에 동참하는 엄마와 자매, 친구들이 등장한다. 남자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공부를 포기해야 했던 엄마는 지영 씨와 언니의 대학 진학을 후원하는 조력자이고, 대학과 직장을 다닐 때 만났던 윤혜진, 차승연, 김은실 팀장, 강혜수 씨는 현실을 일깨워주고, 때로는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는 자매애적 연대를 실천한다. 이 여성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 드리워진 혐오와 분노의 그늘을 벗길 윤리적 대안이 공감과 연대에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뻔하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이제는 ‘우리 모두의’ 김지영 이야기로 한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독서계와 문학 장에 대중적 페미니즘의 열기를 불어넣은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김양선(교양기초교육·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