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秒), 계(季)처럼 가장 짧은 시간부터
계절에 이르는 시간까지 사용된 벼(禾)
밥을 먹고 배설하면 모양이 달라진다는
의미의 똥 분(糞)처럼 재미있는 글자도

지난 주에는 남아 도는 쌀을 소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쌀 관련 제품을 만들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봤다. 실제로 쌀 가공 식품은 밀가루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반갑고 귀한 제품이다. 그런 쌀로 만든 제품들 가운데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쌀로 만든 빵과 과자이다. 이는 쌀 가공 식품의 경우, 밀에 있는 글로텐이 없기 때문이다. 글로텐은 보리, 밀 등의 곡류에는 존재하는 불용성 단백질. 하지만 글로텐에 민감한 사람은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에 밀로 만든 온갖 산해진미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림의 ‘밀가루 떡’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쌀 빵과 쌀 과자의 등장은 글로텐에 민감한 이들에겐 더없이 고마운 소식이다.

돌이켜 보면 쌀은 동양인들-그 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인들-에게 반만년 이상 제공돼온 절대적인 중심 먹거리였다. 지금이야 하루에 한 끼도 밥을 먹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과거에는 쌀밥으로 아침을 시작해서 쌀밥으로 저녁을 마쳤다. 하루 종일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의 탄수화물이 쌀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기운을 뜻하는 기운 기(氣)자 안에는 쌀 미(米) 자가 들어있다. 자고로 쌀로 지은 밥을 먹어야 동양인, 그 가운데에서도 한자 문화권인 중국인들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들은 기운이 솟았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호기심이 생겨 한자 사전을 뒤져보니 쌀 미(米) 자가 들어간 한자어는 모두 249개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로는 낱알 립(粒), 끈끈할 점(粘), 죽 죽(粥), 정기 정(精)이 단연 눈에 띈다. 낱알 립(粒)이 쌀알의 크기를 의미하는 성질을 알려준다면, 끈끈할 점(粘)은 쌀알이 물을 머금은 채 열을 받았을 때의 점성을 알려준다. 더불어 쌀을 오랫동안 넉넉한 물에 넣고 끓이면 조직이 성겨지는 것이 죽(粥)이요, 쌀에서 인간의 기운과 정기가 나온다고 보는 시각이 정기 정(精)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곡식 곡(穀)에도 쌀 미(米) 자가 들어간다. 보리, 팥, 조, 수수, 콩, 기장 등 수많은 곡식 가운데 으뜸은 역시, 쌀이란 의미에서다. 물론, 좁쌀을 의미하는 한자어 속(粟)에도 쌀 미(米)가 들어간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재미있는 쌀 미(米) 연관 한자어는 바로 똥 분(糞)이다. 쌀울 먹으면 다른 형태로 나온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회의 문자다. 그런 까닭에 똥 분(糞) 자는 윗부분이 쌀 미(米)요, 아랫 부분이 다를 이(異) 자다. 이 정도면 한자를 만들어낸 이들의 재치와 해학이 경탄스러울 뿐이다.

한자 사전을 들춘 김에 이번엔 벼 화(禾)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무려 284개의 한자가 펼쳐진다. 쌀 미(米)보다 35개나 많은 수치. 수많은 벼 화(禾) 관련 한자들을 훑어보니 가장 먼저 빼어날 수(秀)가 눈에 들어온다. 뜻을 찾아보니 원래 벼 따위의 이삭이 나와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꽃이 피어 번성하기에 이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빼어날 수(秀)자는 팰 수, 이삭 수, 꽃필 수와 같은 뜻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심을 가 또는 농사지을 가의 뜻을 지닌 가(稼) 역시 벼 화(禾)를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稼)는 일본어로는 돈을 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벼를 심고 농사를 지어 쌀을 수확하면 돈을 벌었을 테니, 참으로 다양한 의미가 벼 화(禾)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와 함께 곡식 곡(穀), 볏짚 고(稿), 쌓을 적(積) 모두 벼 화(禾)자를 사용하고 있다. 곡식은 쌀로 시작해 쌀로 끝나야 되며, 높게 쌓아 올리는 것은 볏집이라는 의미에서다.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초(秒)에도 벼 화(禾)가 들어 있지만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는 계절 계(季)에도 벼 화(禾)가 들어있다. 또 황금 들녘에서 벼를 베어다 탈곡을 해서 햅쌀을 수확하는 가을(秋) 역시 벼를 생략할 수 없는 한자어이다. 자고로 한자 문화권에서 시간을 지배한 매개물은 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벼 화(禾)가 비단 시간과 수확의 한자에만 사용될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평화로운 화(和), 온화할 목(穆), 평온할 온(穩) 모두 벼 화(禾)가 부수인 한자들이다. 아마 벼를 재배하는 과정에서 물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 간의 화목을 강조했기에 벼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하는 매개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물론, 쌀 미(米)에서 유추해 낼 수 있듯이 88번의 손이 가는 만큼 모내기에서부터 잡초 제거는 물론, 농약 살포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손들을 필요했을 터이니 이웃들 간의 협업은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다. 더불어서 벼가 익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수록 농촌의 마음은 더욱 넉넉해졌을 터이니 이른바, 벼 화(禾)로 풀어보는 유물론이 화(和)와 목(穆), 그리고 온(穩)에 다 들어있다고나 할까?

아,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나라 역시, 나라 이름에 벼 화(禾)가 들어간다. 그런 까닭에 중국 역사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기억하기 위해 필자는 진나라를 벼의 나라로 외웠다. 참고로, ‘진’이란 국호를 사용한 다른 나라로는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도 있다.

기왕 한자어로 풀이해 본 벼와 쌀, 이번에는 속담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아무래도 딱딱한 한자어보다는 순 우리말로 만들어진 속담이 벼와 쌀에 대한 지식을 친근하게 넓히도록 유도할 수 있기에. 그럼, 다음은 인터넷을 통해 찾은 벼와 쌀에 대한 우리말 속담들.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자식은 내 자식이 커 보이고 벼는 남의 벼가 커 보인다.

어떤가? 정말 쌀로 시작해서 쌀로 끝나는 것이 우리들의 식탁 아니던가? 그래도 쌀을 멀리하겠는가?

/심훈(언론방송융합미디어 ·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