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원에서 학위 논문을 준비해 온 이후 학자로 살아오고 있는 지금까지 줄곧 한시(漢詩)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오고 있다. 한시는 한국의 문학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역이었다. 이는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세시대 한자문화권의 문학사에서는 문학은 곧 시라는 인식이 아주 강하게 작용하였다. 물론 그 시대에도 일반 산문이나 소설, 비평과 같은 글들도 존재했지만, 문학의 가장 중심에는 시가 있었고, 결국 시인으로서 명망을 얻어야 문학사에서 주요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시는 한문학의 정화(精華)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시는 이제 더 이상 문학사의 주요 장르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미 100여년 전부터 한글로 지어진 현대시가 한시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중국의 경우에도 옛 한시 창작 형식이나 기법과는 전혀 다른 백화문(白話文)의 현대시로 시가 생산되고 있다. 요컨대 한시는 이제 박물관의 박제처럼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한시는 지금의 우리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금 창작을 하는 이가 거의 없기에 그만큼 옛 시는 더 소중하다. 따라서 한시 연구를 업(業)으로 하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한시를 번역하고 풀어서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같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면 한시는 더 이상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현재성을 갖는 유의미한 문학으로 살아서 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민 교수의 저작 『한시미학산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 책의 장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시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친절하다. 사실 한시는 정해진 규칙과 형식이 있어서 일정 기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독자들이 한시를 읽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 먼저 한시에 대해 공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연구자가 독자들을 위해 쉽게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같은 면에서 『한시미학산책』은 일반 독자들에게 매우 친절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그간의 한시비평사에서 주요하게 거론된 항목들이 상당수 기술되어 내용면에서 매우 충실하다. 가령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차이, 시안론(詩眼論), 시참론(詩讖論), 정경론(情景論)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요컨대 독자들은 이 책 한권으로 한시비평사 전체를 대강이나마 훑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저명한 시인과 시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시 감상과 작가론을 공부하는 다이제스트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한시에 대한 저자의 박학(博學)이 바탕이 되어 시인에 대한 일화는 물론, 각종 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詩話]가 소개되어 있어 내용이 무척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다.

넷째, 텍스트는 한시이지만 비평과 해설은 마치 현대시 비평을 보는 것과 같을 정도로 문장이 현대적이어서 현대문학에 익숙한 독자들이 보기에도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고 참신하며, 문체 또한 유려하다. 필자가 이 책을 읽고 흥미롭게 보았던 몇 가지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시마(詩魔)는 제멋대로 시인에게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는 재미있는 귀신이다. 시마가 붙으면 이규보의 경우처럼 시를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게 되지만, 일단 시마가 떠나기만 하면 아예 시를 짓고 싶은 생각도 없어질 뿐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p. 196)

시인이 시를 쓰게 되는 동인(動因)을 소위 “시마”로 규정하고 있다. 시마란 말 그대로 시의 귀신이다. 시마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크나큰 괴로움이자 동시에 특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나 시마가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 “예전의 시화서를 들추다보면 유난히 시인과 곤궁의 관계에 대한 예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크게 간추려보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즉 시인이 궁해진 뒤에 시가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시능궁인詩能窮人’, 즉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대별된다.…(중략)…궁의 상황이 가져다준 실의나 좌절감은 시인 내부의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괴리감을 인식시킨다.…(중략)…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 활동을 이러한 인간 내부의 두 개의 자아를 일치시키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궁의 상황은 보다 나은 예술 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p. 218 및 230)

시인이 궁해진 뒤에 시가 좋아진다는 논의는 한시사의 오래된 명제이다. 물론 이 논의는 간단치 않다. ‘궁(窮)’이라는 개념만 해도 단순히 정치적·경제적 불우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시[예술]에 대한 영원한 갈증과 갈망을 의미하는가 등의 확대된 논의가 발생할 수 있다. 어찌됐든 시[예술] 창작의 동인과 좋은 시인[예술가]이 되는 길을 제시한 점은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의 단점도 눈에 띄는데,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가 현대시 전문 잡지인『현대시학』에 2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들을 손질하여 출간한 것이기에 책의 전체적인 내용이 수미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산발적인 별개의 항목들이 묶여 있어서 다소 산만한 감을 주며 한시사 또는 한시비평사에서 주요하게 거론되어 온 문제들이 빠져 있기도 하다. 가령 대표적으로 품격론(品格論), 성률론(聲律論), 수사법(修辭法) 등에 대한 것들을 꼽을 수 있겠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의의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로 한시 연구자들이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한시 해설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제로 의미 있는 책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점 역시 『한시미학산책』의 공로라 할 수 있겠다. 아무쪼록 가을을 맞아 한림대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옛 한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시심(詩心)을 촉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하정승(교양기초교육 ·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