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는 새로 이사 간 단독주택에서 마당의 작은 텃밭을 가꾸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그러면서 농사와 관련된 속담이나 격언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중에서 내 직업과 관련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글귀가 있다. 하농작초(下農作草), 중농작곡(中農作穀), 상농작토(上農作土). 하급의 농사꾼은 풀을 기르고, 중급 농사꾼은 곡식을 기르며, 최고의 농사꾼은 땅을 기른다는 뜻이다.

이 글귀에 따르면 농사꾼도 급(級)이 있다. 가장 낮은 하농은 풀을 기르는 농사꾼이다. 이들은 당장 뜯어 먹기 좋은 채소만 키우다가 잡초만 자라게 한다. 여러 사람의 텃밭이 함께 있는 공동 주말농장을 보면, 누구네 밭이 초짜 농사꾼의 밭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한다. 상추나 깻잎 등 씨 뿌리고 금방 뜯어먹을 수 있는 쌈채소류를 잔뜩 심어 놓은 밭이다. 그러다가 장마가 지나면서 잡초가 무서운 기세로 올라올 때 제대로 김을 메주지 않으면 텃밭은 잡초로 뒤덮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보다 한 수 위인 중농은 텃밭을 부지런히 가꾸어 가을이면 튼실한 알곡을 수확하는 농사꾼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상농은 땅을 기르는 농사꾼이다. 땅의 힘, 즉 지력(地力)을 북돋아 주어 작물이 기름진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햇볕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건강한 생태환경에서 스스로 자라게 한다.

대학 교수도 마찬가지다. 선생과 학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 교수도 교육과 연구 각각의 영역에서 급이 다를 수 있다. 교육의 영역에서 최고의 선생은 학생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터득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힘, 즉 지력(智力)을 북돋아 주는 선생이다.

지혜의 힘을 갖춘 학생은 땅에 발을 딛고 세상의 바람과 햇볕과 비를 맞으며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터득하여, 자기주도적 학습과 평생학습이 가능하다. 가장 급이 낮은 선생은 취업률과 같은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하여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과 기능 위주의 교육에만 치중한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그럴 듯한 직장에 들어가 성공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 황폐화되어 잡초처럼 무가치한 생활을 연명하게 만들 수 있다.
연구 영역에서도 학자마다 급이 다를 수 있다. 한국의 연구풍토에서 가장 급이 낮은 학자는 주로 외국 학자의 이론과 분석틀을 한국에 그대로 가져와 대상만 달리하여 반복하는 수준의 논문을 양산할 뿐이다. 단기간에 연구실적을 높일 수 있는 이런 논문들은 겉보기에 별로 흠잡을 데가 없다. 이미 상당히 검증된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술적 의미가 거의 없는 잡초 수준의 논문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학자는 연구 생태계의 토대를 건강하게 가꿀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연구에 유용한 개념과 분석틀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연구를 통해서 응용연구를 자극하고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땅의 힘을 기르는 상농작토, 대학교수도 새겨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윤태일(광고홍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