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 3원소가 있듯이 인간의 문명에도 3원소가 있다. 의식주(衣食住) 이야기다. 특히, 의식주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식(食)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해 왔다. 삼림 속에서 아무 것도 걸치지 않던 시절에도 먹거리는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요소였다. 음식은 또한,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약 1만년 만에 오늘날의 눈부신 과학 기술을 배출하도록 유도한 기폭제였다. 잉여 곡물의 생산이 전문직의 등장을 부르며 고대 문명과 국가의 탄생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먹거리는 또, 사회와 국가,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짓는 열쇠이자 자물쇠로 역할해 왔다. 먹거리가 풍부한 국가는 국력이 나날이 신장됐으며 먹거리가 부족한 국가는 국력이 답보 상태에 머물거나 쪼그라들었다. 그런 까닭에 국가의 통치계급은 늘 먹거리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그리고 가격 안정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00년 전의 로마가 그러하였으며, 100여년 전의 일본이 그러하였고 30년 전의 구소련이 그러하였다.

근대의 세계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식량 공급에서 실패한 국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렀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빵을 달라는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왕비 앙트와네트의 말이 불씨를 지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구더기가 담긴 식사를 배급받은 포템킨 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구한말의 조선도 군인들에게 모래 섞인 쌀을 지급했다가 망국을 촉진시킨 임오군란을 야기했다.

그럼, 이번 학기에는 지난 학기에 이어 다시 ‘식탁 위의 인문학’ 두 번째 시리즈를 연재한다. 더불어, 지난 학기에 동양의 먹거리인 쌀을 다루었다면 이번 학기엔 밀을 다루는 것으로 식탁 위를 향한 오디세이를 시작한다.

동양의 주식이 쌀이라면, 서양의 주식은 단연 밀이다. 쌀이 아시아의 문명을 일으키며 동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이른바 모든 것을 관장하는 고갱이로 작용했듯이 밀 역시, 서양사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쳐왔다.

서양 역사에서 밀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가 영어에 남겨진 흔적들이다. 예를 들어, 밀러(miller)라는 성(姓)은 밀가루 빻는 사람을, 파머(farmer)는 밀 수확하는 이를, 베이커(baker)는 제빵업자를 가르치는 용어다. 성경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한 톨의 밀알’ 역시,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하는 기독교 정신이 내밀하게 녹아들어 있다.
다 자라면 높이가 1m 내외에 이르는 밀은 겉모습이 보리와 무척 흡사하다. 외견상 다른 점이 있다면 보리와 달리 긴 잔털이 줄기 끝에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밀은 세계 곡물 생산량에서 있어서도 옥수수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지구촌 먹거리이다. 하지만, 1위의 곡물인 옥수수가 동물 사료로서 주로 재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인간이 먹는 식량의 1위를 차지하는 곡물 중의 곡물이 밀이다.

탄소연대 측정법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농업의 기원과 더불어 재배된 가장 오랜 작물 역시, 밀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인 B.C. 8500년 경에 아르메니아 남부인 코카서스 지방에서 처음으로 작물화가 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밀은 이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유럽과 인도로 퍼져 나가게 된다. 여기에서 코카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역으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유배를 당한 곳이다. 산 꼭대기에서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당한 장소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세상의 시작으로 인식됐던 코카서스는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어 그리스인들의 시각에선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는 장소였다. 그렇다면 당시 그리스인들이 인식했던 세상의 서쪽 끝은?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알려진 아틀라스 산맥이 위한 지중해 지브롤터 해역이 그리스인들의 세계에선 서쪽 끝이었다.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빠져 나오면 이후, 끝도 없이 막막하기만 한 대서양이 펼쳐졌기에 약 5000km에 달하는 두 지점 사이의 거리가 당시 그리스인들이 인식했던 지구였다. 그렇게 볼 때, 세계의 동쪽 끝에서 밀이 탄생한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성 싶다.

그런 밀은 유럽 뿐 아니라 인도,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전파됐다. 하지만 온난다습한 겨울에 잘 자라는 밀은 춥고 건조한 동아시아와는 생태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잘 정착하지 못했으며 주로 중동과 유럽을 중심으로 경작돼 왔다. 그런 까닭에 세계적인 곡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한국의 오곡(五穀)에 끼이지 못한 불우의 주인공이 인류 최대의 먹거리인 밀이다. 참고로, 오곡이란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일컫는 한, 중, 일의 대표적인 곡물들이다. 그래서일까? 한자어로 ‘작은 보리,’ 즉 소맥(小麥)이라 불리는 밀의 이름 역시, 그와 같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의 밀 자급률은 매우 낮은 실정이다. 1년에 국내에서 소비하는 밀의 양은 쌀에 버금가는 350만 톤 안팎인데 이 가운데 국산 밀은 1%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1%의 국산 밀조차도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효율성이 낮기에 가격이 외국산 밀의 4배에 달하는 까닭에서다. 그리하여 매년 1만5천여 톤의 밀이 갈 곳을 못 찾고 차곡차곡 재고로 쌓이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이에 매년 쌓여만 가는 밀을 처리하기 위해 지난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주류산업협회, 그리고 국산밀산업협회가 밀 1만톤을 주정용으로 특별 처분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국산밀을 사용한 빵 뿐만 아니라 국산밀을 사용한 술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럼, 다음 시간에는 서구 문명의 원천인 그리스와 로마를 둘러싼 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심훈(언론방송융합미디어 ·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