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 노무현 정부 초창기에도 ‘개혁’이 화두였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의 고전적 버전이랄까. 검찰 개혁의 기치 아래 파격적인 법무부, 검찰 인사를 단행하는가 하면, 사법 시스템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파격적인 변화의 충격이 잊을 만하면 고개를 내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개혁의 기운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훨씬 더 지난 시절에 다시 봄바람처럼 온 사회를 휘감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개혁이, 대통령과 검사의 맞장토론 생중계, 기수와 서열을 무시한 검찰 개혁 인사 조치와 같이 리더의 의지에서 비롯된, 기획성이 강한 것이었다면, 작금의 ‘미투’ 사태는 그와 다르다. 일파만파로 퍼지며 사회 각 분야에 충격을 던지고 있는 이 연쇄적 움직임은 지도자의 기획이 아니라 완전히 아래로부터 위로, 옆으로 퍼져가는 변화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개혁’의 질적 향상, 혹은 사회의 일보 진전이라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유혹하는 대목이다.

성숙한 사회란 것이,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상위의 가치가 시민사회를 하나로 묶고, 그래서 개인의 스스럼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그 가치들에 의해 가이드 되며, 상호간의 믿음이라는 화폐가 ‘사회적 자본’의 형태로 수북이 쌓인 곳이라고 투박하게 정의한다면, 이번 ‘미투’ 파장이 몰고 온 사회적 충격은 성 평등과 존중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보다 명료한 형태로 우리 사회 ‘상위가치의 장부’에 기재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적어도 실제적, 혹은 잠재적 피해자로 이 사회를 살아온 여성의 만성적 고통과 불편함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졌음은 확실해 보인다.

게다가 정치, 사회, 문화의 변혁에 앞장 서 있던 이들의 충격적인 행태는 그들이 활동했던 개별 분야의 ‘지향’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것이 자유와 평등, 진보라는 사회 정치적 가치에 관한 것이든, 문화와 예술, 혹은 다 뭉뚱그려 그냥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것이든 말이다.

물론, ‘미투’의 열기는 이런 낙관적인 해석과 함께 풀어야 할 숙제에 대한 자각도 불러오는 것 같다. 유교 봉건 사회를 지나오며 오래오래 쌓였던 문틀과 방구석의 먼지들, 성 평등에 대한 자각의 신경세포가 말라붙은 그 찌꺼기들을 다 닦아내고 나면 우리 사회의 ‘사랑방’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람의 온기가 넘쳐나는 왁자지껄한 곳이 될까?

긍정적인 답을 구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 것 같다. (아마, 이 전제의 구현이 ‘미투’ 이후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 전제란, “흙먼지가 묻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사람은 방에서 다 나가라” 하는 배타적 사랑방 청소가 아니라 방에 앉은 식구들이 옷에 묻은 때를 빨래할 세탁기를 마련하고 그가 방바닥에 떨어뜨린 흙먼지를 닦을 걸레를 방 안에 비치하며, 식구들 모두가 세탁기와 걸레가 어디 있는지 알고, 누구라도 방바닥에 검댕이 묻은 것을 발견하면 먼저 걸레질을 하고, 새로온 손님에게 세탁기의 위치와 작동법을 선뜻 알려줄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의 구축이 아닐까. 이런 포용적 사랑방 미화 시스템과 청결의식이 갖추어지면 모두가 단정하게 둘러 앉아 각자 걸어온 여정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재미있는 입담으로 풀어 놓고 또 경청할 수 있는 사랑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와 정치가 닮아야 할 모습이지 않을까.

/주영기(언론방송융합미디어 · 교수)